가을 햇살이 내린 아침, 우리 아이들이 하얀 마스크를 쓴 채 등교하고 있습니다. 반갑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만나 어느새 두 번째 가을을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여름방학 동안에도 마음껏 뛰놀지 못했을 텐데 못 본 사이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조용했던 학교가 다시 활기를 찾았습니다. 2학년 교실을 지나오는데 구구단 외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음을 모아 노래하듯 구구단을 외는 아이들 소리에 초임지에 두고 온 추억 하나가 빛바랜 사진첩처럼 펼쳐집니다. 1995년 3월 1일, 곡송초등학교에 보건교사가 처음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복 많은 제가 당첨되어 그 학교 1호 보건교사가 되었습니다. 시골의 작은 학교이다 보니 보건실을 만들 만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실 한 칸을 1/4로 나눠 보건실을 새로이 꾸몄는데 그곳이 바로 2학년 교실이었습니다. 당시엔 예산이 부족해 베니어합판으로 칸막이를 만든 탓에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얇은 베니어판을 뚫고 보건실로 전해졌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어 함께 지내기에 2학년들에게 향하는 저의 마음이 특별했습니다. 특히, 담임교사로서 참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L선생님으로 인해 2학년 아이들이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당시 2학년은 남학생 열세 명에 여학생이 여섯 명, 2학년이 없으면 학교에 웃을 일이 없다 할 정도로 소문난 개구쟁이들이 많았습니다. 반장 선거를 할 때면 모두 자기가 하겠노라고 손을 번쩍 들었고, 이름을 써내라 하면 모두가 자기 이름을 적는 바람에 투표를 몇 번씩 하고서야 겨우 반장이 뽑히기도 했습니다. 지금처럼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구구단 외는 소리가 보건실까지 들려왔습니다. 외고 또 외고……. 드디어 열아홉 명 모두가 통과 후 구구단 외는 소리가 잦아든 어느 날, 바른생활 시간이었습니다. “자. 지금부터 숙제 검사해요. 어제 자기 본관에 대해 알아 오라고 숙제 낸 거 다 조사해 왔지요?” “예~~~~!” “한 사람씩 차례로 물어볼 테니 대답 잘해 봐요. 먼저, 최현준이는 어디 최씨라?” “저는 경북 최씨라 카던데요.” “현준아~ 누구한테 물어 봤더노?”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엄마가 경북 최씨라 카던데요.” “현준아. 경북 최씨가 아니고 경주 최씰기라. 그라고 경북 최씨라카는 성은 없어여. 오늘 집에 가서 다시 물어 봐여. 다음, 윤민수! 어디 윤씨라 하더노?” “저는 태평양 윤씨라 카던데요.” 순간 저는 너무 우스워 보건실에서 혼자 웃다가 다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2학년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수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인자하신 L선생님께서는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민수야! 태평양 윤씨가 아닐낀데…….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래이.” “맞는데요. 우리 할아버지께서 분명히 태평양 윤씨라 캤는데요!” 민수는 평소 대화 시에도 허스키 한 목소리로 고함치듯 말하는데 태평양 윤씨가 맞다고 강조하는 부분에선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그런데도 2학년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태평양 윤씨란 성도 있나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들이 눈에 선했습니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께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민수야. 니는 태평양 윤씨가 아니고 파평 윤씨일 거라. 오늘 집에 가면 할아버지께 다시 여쭤 보그래이.” 민수는 잠시 헷갈렸었나 봅니다. 분명히 물어보고는 왔는데 공책에 기록하지 않으니 하룻밤 자는 사이 파평 윤씨가 태평양 윤씨로 바뀌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친인척에 대해 공부할 때도 아버지의 형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백숙님’이라 답했고, 쉬는 시간에는 ‘뽀뽀와 키스의 차이점’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 2학년 교실의 풍경은 한 편의 재미있는 동화처럼 늘 감동과 웃음을 주었습니다. 해마다 9월이 되어 구구단 외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때 만났던 2학년들과 고인이 되신 L선생님이 문득문득 생각납니다. 개구쟁이들의 엉뚱한 질문에도 자상하게 그리고 사투리를 섞어 쉽게 설명하며 행복한 교실을 선물해 주셨던 L선생님. 때론 할아버지처럼, 때론 아버지처럼 어린 제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기에 제 마음속에 참 좋은 선생님으로 자리하고 계십니다. 그해 겨울, 안타깝게도 당신께선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고 명예퇴직하여 교단을 떠나셨습니다. 올해 8월 말에도 경북교육을 위해 헌신하셨던 많은 분들이 정년·명예 퇴직으로 정든 교직을 떠나셨습니다. L선생님처럼 오직 한길, 가르치는 일에만 한평생을 바치셨던 그분들의 삶이 요즘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자신 또한 25년 교직 생활을 갈무리하고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쉼도 잠시, 코로나19로 인해 작은 학교에서 기간제 보건교사로 다시 일하고 있습니다. 이곳도 보건교사가 처음으로 배치되어 또다시 1호 보건교사가 되었습니다. 9월의 첫날, 보건실을 새로 만들어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문을 열면 아픈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힐링 되도록 정성을 다해 꾸몄습니다. 문득 첫 근무지였던 곡송초등학교의 보건실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폐교가 되어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곳이지만 새내기 교사로서 열정을 다했던 그 마음을 다시 꺼내어 봅니다. 아이들의 구구단 외는 소리로 시작된 이 가을, 보건실을 찾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L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최종편집: 2025-05-10 04: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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