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三韓) 시대는 역사 기록이 극히 희소하여 고대사의 상세한 전모를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00년 경 우리나라의 남쪽에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는 부족 국가가 존재했던 시대가 있었다. 마한과 진한, 변한의 각 나라들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온조가 남하했을 때에도 긴 세월 동안 마한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었고, 최대 5~6세기에도 전남 지방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존재했었다. 수혈식 고분과 석곽 등을 볼 땐 마한, 변한, 진한은 상대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서로 비슷한 양식과 문화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진한과 변한은 서로 거의 비슷한 문화 양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다. 대체적으로 마한이 백제의 남하로 인해 백제에 병합되고 변한은 후에 가야로, 진한은 후에 신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사기(史記) 자체가 불확실한 삼한시대를 거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스꽝스럽게도 21세기 한반도 지형이 삼한(三韓)으로 명확히 분립(分立)되었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결과 남한(南韓)이 동한(東韓), 서한(西韓)으로 완전히 갈라져 기존의 북한(北韓)과 더불어 삼한(三韓) 시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등줄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태백산맥을 경계로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이 선명하게 나뉘어졌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로, 지역적으로는 미래통합당의 동쪽과 더불어민주당의 서쪽으로 갈라졌다.
지도에 그려진 총선 당선자 표시를 보면 한반도의 동쪽, 이를테면 강원도 경상북도 대구 울산 부산 경상남도는 핑크색으로 도배를 했다. 서쪽, 이를테면 서울 수도권을 포함하여 인천 충청북도 충청남도 대전 전라북도 전라남도 광주는 블루색으로 도배를 했다. 일부러 둘로 구분해서 색칠한 것처럼 선명하게 분리시켰다. 국민의 뜻이 이렇다는 것이다.
국민을 둘로 갈라놓은 심사가 뭔가? 남북으로 갈라져 고통을 당하는 나라가 둘도 모자라 셋으로 갈라져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다고 입이 벌어졌지만 벌린 입을 닫기 전에 성찰부터 해야 할 것이다. 성찰이 제대로 안 되면 벌린 입에 ×이 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마음도 가르고 지역도 가르면 국민은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인가.
4·15 총선을 통해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가 극단적 형태로 되살아났다. 더불어민주당은 서쪽 지역을, 미래통합당은 동쪽 지역을 석권했다. 4년 전 20대 총선에서 좌우 거대 양당의 완충 역할을 했던 제3 정당들은 의석이 크게 줄면서 사실상 설 자리를 잃었다. 작년 말 범여권 정당들이 다당제 구도를 만들겠다며 ‘4+1 협의체’를 통해 일방적으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했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비례 위성 정당을 만들어 80%가량의 비례 의석을 가져가면서 ‘여야 양극화’는 더욱 첨예해졌다.
지난 총선에선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23석을 차지하며 ‘녹색 바람’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호남 전체가 민주당으로 쏠렸다.반대로 영남에선 미래통합당이 90% 이상의 의석을 가져갔다. 대구, 경북 등 TK 지역에선 한 곳을 빼고 모든 곳에서 이겼다. 지난 총선에선 보수의 아성으로 통하는 대구에서 이변이 일어났었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었다. 정의당과 민생당 등 다른 군소 정당들은 지역구에서 한 곳을 건지는 데 그쳤다. 지난 총선 때 50석 가까웠던 제3당과 군소 정당의 의석이 10석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치면서 양당이 의석을 독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중도 세력의 국회 진입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는데 민주당부터 제도를 악용한 ‘꼼수’에 뛰어들면서 망국적인 결과가 나왔다. 2012년 4월 총선보다 더 심각한 동서 양분 현상으로,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단면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당, 정의당, 열린민주당, 친여 무소속을 합친 범진보 진영 당선자는 190명인 데 반해 미래통합당과 한국당, 국민의당 등 범보수 진영 당선자는 110명에 머물렀다. 당선자 수만 놓고 보면 정권에 대한 지지가 반대의 두 배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야 정당의 실제 득표수 차이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역구 선거 득표는 1434만 표 대 1,191만표로 243만표 차였고 득표율로는 49.9% 대 41.4%였다. 득표율 차는 8.5%포인트인데 당선자 수는 더블 스코어로 벌어진 것이다.
승자 독식 체제인 소선거구제로 인해 수도권 121석 중 85%에 해당하는 103석을 여당이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국 8.5%포인트의 득표율 차이가 실제 의석수에선 거의 두 배 차이로 나타나게 됐다. 수도권 의석수 차이는 6배가 넘지만 득표율 차이는 12%포인트다. 의석수로는 야당이 궤멸된 수준이지만 야당을 찍은 민심의 크기는 결코 그렇게 작지 않다. 유권자 41.1%, 1,200만 표에 가까운 야당 득표 속에는 나라 경제를 어렵게 만든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최저임금제, 주52시간 근로제 같은 이념형 정책에 대한 반대와 울산시장 선거 공작, 조국 비리 같은 정권 핵심의 불법행위에 대해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민심이 담겨 있다.더불어민주당에서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자화자찬이 터져 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정세균 총리는 "문 대통령이 일촉즉발의 북핵 위기 상황에서 취임하셔서 평창 동계올림픽 기회를 살려 남북대화의 모멘텀을 만드셨고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시대로 가는 초석`을 잘 닦으셨다”고 문비어천가를 읊었다.
지난 3년은 대통령의 위기 극복 리더십이 빛난 시기였다고도 했다. 민주당과 소속 광역·기초단체장들은 정부 대책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발언을 쏟아냈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파상 공세를 시작하는 등 총선 승리를 정권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 이겼다고 불법이 합법으로 바뀌면 법치국가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2004년 총선에서도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을 합한 의석수가 180석에 가까웠다. 당시 여당은 자신들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준 선거 민심을 자신들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해도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좌충우돌했다. 그리고 3년 후 대선에서 531만 표 차 대패를 당하고 정권도 빼앗겼다.
1등이 의석을 가져가는 ‘승자 독식형’ 소선거구제가 이 같은 결과를 낳았다. 통합당을 지지한 사람도 상당수인 만큼 앞으로 사회 갈등이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진보, 보수 모두 시대역행적으로 퇴행했다. 망국적 지역감정에 ‘망국적 진영논리’까지 가세하여 확증 편향이 심해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대에 대한 비난으로 강화하고 있다. 본인의 콘텐츠가 없으니 ‘저 적폐들을 때려잡자’는 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문재인은 ‘교조적 진보주의자’이다. 김대중 노무현에 비해 이념적으로도 후퇴했고 행태적 측면에선 권위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진보는 퇴화 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진보나 보수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 정치는 삼한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