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혜인이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7월이었다. 시청에서 복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분으로부터 초등학생의 딱한 사정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혜인이네 4남매와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혜인이 엄마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여성으로 비교적 한국말을 잘했다. 엄마는 미국적자로 큰애는 3학년, 여동생은 1학년, 쌍둥이 남동생은 유치원생으로 학교 준비물을 사기도 어렵고 애들이 먹는 것, 입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해 8월, 혜인이와 동생들은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고 난 여기저기 부탁하여 장학금을 모아 매월 장학금을 주었다. 방과 후 활동과 체험학습에 필요한 모든 준비물을 학교에서 제공해 주어 집에선 학교만 보내면 되도록 해주었다. 혜인이는 늘 나의 관심을 끄는 아이였다. 매우 영리하고 재능이 많아서 드론레이싱에서도 1,2위를 다투는가 하면 백일장에서 상을 받고 학교밴드에서도 싱어로 활동하며 자기의 소질을 키워 갔다. 하지만 늘 자신감이 없고 얼굴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먼저 나서서 “제가 할게요”보다는“혜인이도 해 보렴”하고 멍석을 깔아주어야 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선생님, 제가 김천시 승격 70주년 뮤지컬 공모에 당선되어 10월에 공연을 하게 되었어요.”초등학교 제자이고 서울에서 뮤지컬을 공부한 제자 이슬이가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어서 아역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행이었다. ‘인현왕후’의 어린 시절을 노래할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슬아, 아역 주인공 오디션에 시골 학생들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다문화에 편모가정으로 자신감은 없으나 자존심이 센 아이,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시골뜨기 아이를 ‘인현왕후’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타고난 음색은 아름다우나 음악시간 외에는 성악지도를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해 음정과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눈에 보였다. 도시 아이들과의 수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혜인이는 타고 난 소리와 음악적 감각이 있어서 연습만 잘 하면 될 거 같아요.”학생들을 지도해서 전국대회에서까지 상을 타오는 베테랑 선생님인 박미란 선생님께 혜인이의 지도를 부탁했다. 혜인이가 성악 지도를 받는 동안에 선생님댁으로 데려오고 마치면 집으로 데려다주는 일이 시작되었다. 연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평일엔 Mr로 들으면서 연습을 하고 학교에서 내가 봐주기도 하고 1주일에 한두 번씩 박미란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았다. 주변에선 시내에 잘하는 애들이 많고 많은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난리였다. 하지만 시골 아가씨를 왕비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결국 혜인이는 당당하게 인현왕후 아역에 캐스팅이 되었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빠른 비트에 엇박자가 많아 리듬을 타야 하고 가사가 랩처럼 빨라 따라 하기 조차 힘든데 혜인이는 뮤지컬 연습을 잘 따라 주었다. 소녀 ‘인현왕후’가 저자거리에 나와 장터를 돌아다니며 부르는 노래는 피아노 선율에 얹어져서 약동적이고 발랄한 모습을 소녀의 감성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장면이었다. 숙종과의 만남은 의미 없는 듯 스쳐지나가면서 합창과 어우러지기도 하고 독창을 하기도 하면서 청중을 압도해야 하는 무게감 있는 역할을 혜인이는 잘 익혀가고 있었다. 왕후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매일 연습 장소로 차로 테워주고 와야 하고 노래에 맞춰 안무와 대사지도 해주는 것도 버거운데 서울에서 하는 리허설에 꼬마 아가씨를 데리고 갔다가 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다른 집 애들 같으면 캐스팅만 되어도 부모가 알아서 척척 할 텐데…….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다 챙겨 주어야 하니 시간을 내기가 힘들고 혜인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혜인아, 너도 힘들고 나도 어렵지만 우린 잘 할 수 있어! 아니, 잘 해야만 해!”이제 세팅은 끝났다.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무대를 휘어잡을 인현왕후! 자랑스럽게 변신한 혜인이의 무대에 엄마를 초대하고 학교에서는 단체관람을 신청했다. “시끌벅적 소란스러운 운종가에 장터--” 10월 31일 첫 공연을 마치고 커튼콜을 하면서 혜인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생기 있는 얼굴에 똘망한 눈이 어찌나 빛이 나던지! 마치 딴사람이 된 같았다. 친구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가 다른 다문화에, 동생 셋이나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소심한 시골 소녀였는데, 연예인을 바라보는 듯한 친구들의 눈빛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혜인이는 자신감을 찾아갔고 감사하게도 다섯 번의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시승격 70주년 기념 뮤지컬 무대에서의 혜인이 모습엔 훌륭한 집안에서 자란 왕후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 기품에는 ‘나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혜인이 어머니의 얼굴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그 눈물은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어려운 환경에서 잘 자라준 감사의 눈물이었으리라. 혜인이에게 기쁜 소식이 연달아 찾아왔다. 경북 학생 동요대회에서 은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혜인이에게 검정 구두와 단정한 정장을 마련해 주고 피아노 선생님도 지원해 준 보람이 있었다.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단 2명만 주는 코리안 타임즈 주최 제 8회 한국다문화청소년상에서도 혜인이가 수상하게 되었고 부상으로 100만원을 받았다. “혜인아, 이젠 날개를 활짝 펴고 너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렴. 어려움을 극복하고 활짝 웃는 멋진 왕비! 네가 자랑스럽다.”*한국교육신문사 주최 2020 교단수기 금상 수상작
최종편집: 2025-05-10 0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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