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최씨(和順崔氏) 정려각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각으로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기 위해 투신자결한 화순최씨를 기리는 정려각이다.화순최씨는 양천동 하로마을이 친정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에 원터마을 연안이씨 이정복(李廷馥 1575~1637)에게 시집갔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친정에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댁을 찾았다. 마을입구에서 왜병을 만나 능욕을 당할 지경에 이르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마을 앞 웅덩이에 투신, 자살을 했다.이때 부인을 따라온 여종 석이(石伊)도 부인을 구하려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죽었다.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지역 유림에서 조정에 상소를 올려 1632년(인조10) 어필정려문을 내리고 1764년 정려각이 세워졌는데 1812년(순조12) 중수가 있었다.정려각 내 정판에는 “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절부부호군이정복처증숙부인화순최씨지려)”라 적혀있고 같은 글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1975년 최씨담 연못 준설 공사 도중에 “忠奴石伊之碑(충노석이지비)”라 새겨진 비석이 발견돼 정려각 앞에 세워졌는데 화순최씨 부인을 구하기 위해 웅덩이에 뛰어들었던 종 석이를 기리는 비석이었다.정려각 옆에는 방초정이라는 정자와 최씨담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화순최씨가 자결한 후 이정복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짓고 투신한 웅덩이를 확장해 최씨담이라는 연못을 만들었는데 방초정은 자신이요, 최씨담은 부인을 상징함이니 이는 곧 영원히 부부로서 함께 하겠다는 이정복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윤은보(尹殷保) 서즐(徐○) 정려각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김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 고려말 향리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장지도와 윤은보, 서즐 등 사제지간인 세 사람의 효행이 서린 정려각이다.정려각 옆으로는 “張盤谷尹節孝徐南溪三先生遺墟碑(장반곡윤절효서남계삼선생유허비)라 새겨진 비석이 있다.장지도는 옥산장씨로 수원부원군 장을포(張乙浦)의 손자로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지례 거물리에서 태어났다.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조정에서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 조선 건국 초에 종4품의 소감(少監)직에 올랐으나 태종 조에 이르러 골육상잔의 참극을 목격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낙향 후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전한다.“천년 반곡은 평평한 방안 같고 깎아지른 앞산은 석성을 이루었네. 예부터 몇 집이나 대를 이어 살아왔던가? 오늘에 이르러 열 집이나 관직을 얻었네. 처마 밑 드리운 감과 밤은 산중의 진미요, 문에 걸린 구름은 세상의 인정을 잊게 하네. 출세하다 버림받음을 원망하지 마라. 편안하고 한가한 손님이 자연과 친구가 되었지 않은가.”이 시를 통해서 볼 때 장지도는 조선왕조에 종사할 뜻이 없으며 과감히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낙향해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겠다는 불사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장지도는 향리인 거물리 반곡(바람실)에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길러내어 지례현의 향풍을 쇄신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제자들 중에서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의 학문이 출중했는데 두 사람은 아들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어버이의 예로서 봉양해 훗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효의 행적이 수록돼 지례의 명성을 드높였다.다음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린 장지도와 윤은보, 서즐의 행적이다.“知禮縣人尹殷保, 徐○, 俱學於同縣知宜州事張祉, 一日相謂曰, 人生於三, 事之如一, 況吾師無子可養乎?” 得異味輒饋 每遇良辰, 必具酒饌, 如事父然. 張沒, 二人請廬墓於其親, 親憐而聽之. 乃玄冠腰○, 居墓傍. 躬○供奠, 尹父嘗病, 卽歸奉藥, 依不解帶, 父愈, 令復師廬. 月餘尹感異夢, ○歸則父果異夢夕病作, 未旬而死. 尹晨夕號哭, 不離喪側, 旣葬, 廬父墳. 一日飄風暴起, 失案上香盒, 數月有烏銜物, 飛來置塋前, 人就視之, 卽所失案上盒也. 至朔望酋奠張墳, 徐終三年, 宣德壬子, 事聞, 殷保 ○, 竝命旌門拜官”譯)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은 같은 고을 지의주사벼슬을 한 장지도에게 배웠다. 하루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으로 태어나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은 섬기기를 하나같이 하라 했는데 우리 스승이 아들이 없으니 우리가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문득 맛있는 것이 생기면 스승에게 먼저 드리고 명절이면 술과 반찬을 준비해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장지도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여묘살이 할 것을 청하니 아버지는 가련하게 여겨 허락했다. 이내 상복을 입고 묘 옆에서 살면서 몸소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드니 곧 돌아가 약을 올렸는데 이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한달여가 지나서 윤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열흘이 되지 않아 별세했다. 윤은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 무덤에 여막을 지었다.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향로가 날라 갔다. 몇 개월 뒤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합이었다. 삭망이 돼 장지도는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서즐도 3년상을 마쳤다. 1432년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윤은보와 서즐에게 정려와 벼슬이 내렸다.남계 선생은 이천서씨(利川徐氏)로 고려 성종 때 거란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거란군을 철수케 하고 강동6주를 회복하는데 기여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의 11대손이며 원주판관을 역임한 서강(徐强)과 양천허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지례현 거물리에서 태어나 자를 덕의 (德以), 호를 남계(南溪)라 했다.남계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 건국초기 지례로 낙향한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의 제자가 돼 절효(節孝) 윤은뵤(尹殷保)와 함께 아들이 없는 스승을 위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한 행적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등재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삼강행실도’는 1428년(세종10년) 진주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세종은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가려 뽑아 모두 105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당대의 이름난 화가인 안견(安堅)과 최경(崔涇)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1436년(세종18) 편찬한 교훈서이다.특히 효행을 기록한 35편 중 31편이 중국의 사례이고 4편만이 우리나라의 이야기인데 이 가운데 ‘은보감오(殷保感烏)’ 즉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는 제목으로 서즐과 윤은보의 행적이 수록되니 지례고을이 명실공히 예향(禮鄕)으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삼강행실도’에 따르면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을 하나같이 섬기기로 결의하고 성심껏 모셨고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 도중에 윤은보가 부친상을 당해 여막을 지키다가 회오리바람이 불어 날아갔던 향로를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14)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스승인 장지도 선생과 제자인 윤은보, 서즐 등 세분을 기리는 삼효정려각(三孝旌閭閣)과 삼선생유허비(三先生遺墟碑)가 지례면 교동 옛 도로변에 나란히 섰고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 동별묘에 세분이 함께 배향됐다. 세종대왕은 1426년 진주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하자 충효열(忠孝烈) 즉 삼강(三綱)을 바로 잡기 위해 설순과 안견으로 하여금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연구해 ‘백성교화서’를 발간하게 하니 이것이 곧 ‘삼강행실도’이다. 모두 105편의 사례가 실렸는데 이중 우리나라 최고의 효행 사례 4건 중에 윤은보와 서즐의 행적이 실렸다. 윤은보의 묘비(坡平尹公殷保墓碑)에 다음과 같은 시가 기록돼 있다. 孔門廬墓載遺篇 공문(孔門)의 여묘(廬墓)살이 남겨진 글에 실렸으나 師道千年○不傳 스승의 도(道) 천년토록 병들어 전해지지 않았었네 誰料窮鄕初學輩 궁벽(窮僻)한 시골의 처음 배우는 이가 누가 알리 種楷腰經企前賢 성인(聖人) 가르침 실천하여 법 심으며 앞 현인(賢人)처럼 되길 바랄 줄을 一○而分性本眞 한 몸에서 나누어졌으나 성품은 본래 진실해 夢驚親○氣通神 어버이 병환에 꿈에도 놀라니 기운이 신묘(神妙)하게 통했네 慈烏反哺能相感 반포(反哺)하는 까마귀도 능히 감동(感動)되어 香合啣來慰棘人 향합(香合) 물고 와 상주(喪主)를 위로하네 세종대왕은 1432년(세종14년) 두 사람에게 정려와 벼슬을 내렸는데 김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서 지금도 지례면 교리 마을 입구에 자랑스럽게 서 있다. 두 사람의 행적으로 인해 ‘예를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 지례(知禮)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김치봉처 열녀 안동김씨열녀각김해김씨 김치봉(金致鳳)의 처 안동김씨(김원술)부인의 열녀각으로 1955년 건립됐다. 김원술은 17세에 김치봉에게 출가해 신혼 초에 남편이 병들자 지극정성으로 구완하고 결혼 7개월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김천지방에 남아있는 가장 근세의 열녀각으로 조선시대와 달리 마땅히 정려를 요청할 길이 없자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열녀비와 열녀각을 세웠다.열녀각 내의 비석에는 “金海人金致鳳妻烈女安東金氏之碑”라고 새겨져 있다.여치응처열부성주도씨정려각성산인(星山人) 여치응(呂致鷹/1835-1855)의 처(妻) 성주도씨(星州都氏)부인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정려각이다. 부인은 도운동(都運東)의 따님으로 여치응에게 출가한 후 일찍이 예의범절이 바르고 남편과 시부모에게 정성을 다해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수년만에 남편이 별세하자 고례(古例)의 예법에 맞춰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고 삼년 동안 영위(靈位)에 제물(祭物)을 차리는 것이 한결같았고 효성(孝誠)으로 홀 시어머님을 봉양(奉養)함에 조금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삼년상(三年喪)을 마치는 날, 제물(祭物)을 갖추고는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했고 1869년(고종6년) 지역 유림(儒林)의 천거로 나라에서 정려(旌閭)와 함께 후손 20가구의 호역(戶役/부역)을 면제받는 은전이 내렸다.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 끝자락에 정려각이 처음 세워졌다가 1990년 주변에 공단이 조성되면서 감천 너머 꿀재 고개 아래로 옮겼다가 국도3호선 터널공사로 인해 201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풍기진씨 정려각풍기진씨(豊基秦氏) 부인은 1912년 진희태의 딸로 대구에서 태어나 18세에 상원리 원터마을 연안이씨 이기영(李○永)에게 출가했다. 남편이 1935년 병환으로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48일 만에 죽었다. 1937년 지역유림에서 열행비와 비각을 세웠다.1937년 간행된 ‘교남지(嶠南誌)’ 열녀편에 부인의 행적이 다음과 같이 수록돼 있다.“진씨(秦氏)는 풍기인이요, 희태의 딸이다. 연안인 이기영의 처요, 효순하고 부덕이 있어 남편이 병이 심해 함께 달성에 가서 치료하고 밤이면 하늘에 눈물 흘리며 기도했으나 상을 당해 몸소 관을 옮기고 통곡하니 남편의 시체가 마당에서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부모가 그 뜻을 알고 네가 근친을 갔다오라해 친정 가서 하룻밤을 자고 친정어머니에게 유서를 써놓고 남편 죽은 자리에서 따라 죽으니 원근 선비들이 모여서 포상했다.”
정수인 처 김녕김씨 정려각감천면 무안리 무릉마을 입구에 위치한 정려각으로 동래정씨 정수인(鄭壽麟 1859년생)의 처 김녕김씨(金寧金氏) 부인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김녕김씨 부인은 홀시아버지를 성심껏 봉양하다 79세로 졸하자 남편과 함께 3년간 매일 산소에 찾아가 곡을 해서 무릎 꿇은 자리에 구덩이가 생기고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역 유림들이 성균관에 청원해 1925년 정려가 내렸다. <자료제공 : 김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