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구성원 간의 화목과 행복한 가정을 염원하는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빈국이라는 굴욕의 터널을 벗어나 오늘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번영 속에서 풍요로운 가정을 이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지난날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앞장선 순국선열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역사의 그늘에 가려 알려지지 않은 김천지역 세 분 선열의 활약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남산동 출신으로 대동단 가입, 독립운동 인쇄물 배포한 권태석해방 후 민족 분열 막기 위헤 노력하다 해주에서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권태석(權泰錫)은 일제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95년 8월 18일 김천군 김천면 남산정 174-1번지(현 김천시 남산동 174-1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우(夢牛)이다. 권태석은 충청도 홍성에서 중국과 중개 무역을 하던 최익환과 동업을 했으나 3·1운동 직전 길림을 다녀온 후 최익환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했다.1919년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3·1운동의 열기가 식어 가자 대동단은 독자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5월 23일 일본 경찰이 서울에서 남작 김가진 등 20명 이상의 귀족이 신문 기자단과 대동단 회원 및 학생 등과 연합해 독립 선언서를 배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일 아침 이능우 · 최익환을 시작으로 권태석 · 나경섭 · 김영철 등을 차례로 검거했다. 당시 권태석은 문서 인쇄와 배포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으며 최익환과 함께 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려다 체포됐다. △권태석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 <권태석 재판 관련 판결문>출옥 후 권태석은 최익환 등 초기 대동단 지도부 일부와 청년·학생 그룹에 속했던 인물들과 함께 서울청년회 조직에 관여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1922년 3월 권태석은 장덕수가 주도하던 사상 단체인 세계협회에 참여했다. 또한 1924년 5월 국내에서 통일적 당 창립을 목표로 한 조직인 13인 회의가 결렬된 후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이 체제를 재정비할 때 최익환과 함께 고려공산동맹에 가입했다.1926년 7월에는 민족 협동 전선의 결성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민흥회의 발기에 참여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울에서 당 통합 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안광천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하필원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조직부원으로 활동했다. 아울러 조선민흥회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으로도 선출됐다. 1927년 2월 권태석은 조선민흥회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동하기로 결의하는 과정에서 합동위원이 돼 신간회에 가담했으며 신간회 창립대회 직후 서무부 총무간사로 선임됐다.같은 해 12월 권태석은 서울 춘경원에서 열린 서울파의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운동 방침에 관한 테제’를 제출했다. 1928년 1월에는 ‘조선일보’에 ‘조선 사회운동 개관’을 실었다. 1929년 2월 권태석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4년 6월 석방돼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해방 후인 1945년 9월 1일 권태석은 건국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위원으로 위촉됐으며 무경부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 26일 창당된 신한민족당 정치국 차장에 임명됐다. 1946년 1월 한민족당 대표로 임시정부가 주최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에 참여해 비상정치회의 기초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4개 정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할 때 신한민족당 대표로 참여해 조사부장에 임명됐다.모스크바삼상회의를 둘러싼 좌우간의 대립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권태석은 1947년 5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가 한국독립당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권태석은 민주한독당 창당을 주도하고 중앙상무위원으로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고자 했다. 1947년 12월 20일 여운형 암살 이후 중도 세력의 강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이 됐으며 1948년 4월 22일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권태석은 1948년 8월 다시 북으로 가던 중 23일 해주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아포읍 송천리 출신으로 송천교회 중심 독립운동 주도한 김교훈교사로 근무 중 일경에 체포, 1년간 수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김교훈(金敎勳)은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96년 12월 2일 김천군 아포면 송천동 120번지(현 아포읍 송천리)에서 김치주(金致珠)와 권송림(權松林)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취헌(翠軒)이다. 김교훈은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중 1917년 10월 1일 송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김교훈은 3월 26일 구미 장날에 일어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인근 지역 교회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때 모은 자금은 모두 최재화에게 전달했다. 당시 김교훈은 아포면 제석리의 김남수를 만나게 됐다. 이때 김남수는 재당숙 김성숙에게서 1,400원이란 거금을 얻어 내 독립 자금을 모금하던 김교훈에게 전달했다. 한편 김교훈은 아포 지역에서 ‘혁신신보(革新申報)’와 ‘신한별보(新韓別報)’를 입수해 기사를 발췌한 후 이를 인쇄해서 배포했다.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간 김교훈은 고산좌(孤山座)에 활동 기반을 세우고 군관 학교에 자금 지원을 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전력을 경주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김교훈은 송천교회 영수 및 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1년 경찰에 검거돼 1921년 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 △김교훈  △김교훈 묘소 1922년 출옥 후 그는 다시 송천교회로 돌아와 영수로서 봉사했으나 점차 교회 생활에 소홀해지면서 책벌을 받기도 했다. 김교훈은 인근 지역 곳곳에 청년들의 민족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웠는데 김천의 대둔서림(大屯書林), 선산의 죽림서림(竹林書林), 상주의 갑장서림(甲長書林) 등이 대표적이었다. 해방 후인 1949년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시해 소식에 충격을 받아 두문불출하다가 1973년 5월 31일 향년 80세로 별세했다.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의 신암선열공원(新岩先烈公園)에 안장됐으며 묘비가 세워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아포읍 제석리 출신으로 만세시위운동 주도한 김남수군자금 모집혐의로 체포돼 10개월 투옥,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김남수(金南洙)는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00년 5월 18일 김천군 아포면 제석리 274번지(현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음력 8월 중순경 김남수는 아포면 인리(仁里)에 있는 백남태(白南台)의 방에서 같은 지역 민족 운동가였던 김교훈이 구미 선산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있음을 알았다. 김남수는 자신의 재당숙 김성숙으로부터 1,400원이라는 거금을 얻어 김교훈에게 전달했다.이후 김남수는 김교훈과 더불어 최상문(崔相文)과 만나 엄용호(嚴龍鎬)로부터 입수한 ‘혁신신보’와 ‘신한별보’ 기사를 발췌한 후 이를 등사해 인근 지역에 배포함으로써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이들 신문들은 신민회 회원으로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김태연(金泰淵)(김단야)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지하신문으로 발간한 것으로서 김남수는 김교훈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이들 신문의 발췌 기사를 인쇄하게 했다. 또한 ‘신한별보’를 휴대하고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배점석(裵點石)에게 가서 그 신문을 보여 주고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한 다음 독립 운동 자금으로 50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김남수는 이러한 군자금 모금 활동과 독립사상 고취 혐의로 체포돼 1921년 2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남수 묘소송기동(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최종편집: 2024-06-16 12: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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