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김천은 영남제일문향이라 해서 많은 역사적인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다. 조선후기의 유학자이자 실학자로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은 이 고장을 일컬어 “밭이 기름져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는 까닭으로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노산군을 섬긴 최선문을 배출한 고장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이중환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최선문을 비롯한 이 고장 출신 역사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편집자 주> 공조판서 문혜공(文惠公) 최선문(崔善門) 최선문은 화순최씨로 중부령(中副令)을 지낸 최자강의 아들로 양천동 하로에서 1400년(정종 2) 태어나 자는 경부(慶夫), 호를 동대(東臺)라 했다.1420년(세종 1) 20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하로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다 부친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1421년(세종 3) 지평(持平)으로 관직에 잠시 나아갔다가 다시 향리에 은거함을 반복했다. 1451년(문종 1) 문종이 공의 명성을 익히 알고 이조판서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재차 공조판서직을 내리자 “신하된 도리로 임금의 뜻을 거듭 거스를 수 없다” 며 출사했다.문종은 공의 학문을 아끼시어 크고 작은 정사를 처리함에 유독 공에게 의견을 물었고 친히 화원에 명해 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이를 하사해 극진한 신임을 나타냈다. ‘교남지(嶠南誌)’에서 이르길 “최선문은 맑고 겸손함을 표현함으로써 관가를 다스리기를 집같이 하고 임금 섬기기를 부모같이 했으며 송죽 같은 지조와 물과 달 같은 정신을 지녔다”라고 적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하로로 낙향했는데 세조가 공을 따르는 선비들이 많음을 알고 회유하고자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했으나 끝내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고 “내 죽더라도 명정(銘旌)에 좌찬성직을 절대 적지 말아라”고 까지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최선문은 노산군(端宗)을 위해 절의를 지켰다”라고 기록해 공의 절개를 추앙했다. 운명 직전 자손들에게 내린 경계문(鏡戒文)에서 “형은 화애롭고 동생은 공손함이 가정의 화평이요, 성인의 훈계는 분명 떳떳한 도리를 도우리. 우리 최씨 세세의 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관을 하사받을 때 일을 모름지기 보거라”고 했다. 1456년(세조 2)공이 졸(卒)하자 세조는 예관(禮官)으로 유호인(兪好仁)을 보내고 청백리에 녹선함과 함께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점필제 김종직은 만사(挽詞)에서 “오복(五福)을 다 갖춘 인간은 어렵지만 하나의 결점도 없는 선생은 성정이 지극히 너그러웠다”고 적었다.슬하에 5남 4녀를 뒀는데 한공(漢公), 한후(漢侯), 한백(漢伯), 한번(漢藩), 한남(漢南)등 다섯 자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기록을 남겨 세상 사람들이 하로마을을 가리켜 ‘오자등과방(五子登科坊)’으로 부르기도 했다.청백리 평정공 노촌 이약동(李約東) 평정공 노촌 이약동은 1416년(태종 16) 양천동 하로마을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경(春卿),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어릴 때 이름은 약동(藥童)이라 했는데 이는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한 모친이 금오산 약사암(藥師庵)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얻은 아들이라는 뜻을 담았다 전한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했고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출신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다.26세 되던 해인 1442년(세종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청도군수(44세), 선전관(49세), 구성부사(51세), 제주목사(55세), 경상좌도수군절도사(59세), 사간원대사간(62세), 경주부윤(63세), 오위도총부부총관(66세), 호조참판(68세), 전라도관찰사(71세), 이조참판(72세), 개성유수(74세), 지중추부사(75세)에 이르기까지 40여년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평정공은 성정이 부드럽고 인자해 지방관으로 재임 시 가는 곳마다 칭송이 따랐는데 특히 1470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직후 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동사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제단을 산 아래로 옮기게 한 일은 지금까지도 도민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화다. 제주도 역사서인 탐라지(耽羅志)에 이르기를 “선생이 일찍이 목사가 돼 귤 재배를 장려함으로 도내에 인애의 유풍이 있었다.이임할 때 관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관아에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는데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문 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채찍이 떨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 자취를 그려서 사모함을 부치었다. 또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바다 가운데 이르자 홀연히 기울어지며 휘돌아서 위태하게 됐다. 선생이 엄숙하게 말하길 “나의 걸음에 사사로움이 있어 신명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침이 있게 하는가?”라 했다.이때에 이르러 일행이 아뢰길 고을 사람들이 선생에게 전하라고 갑옷 한 벌을 일행에게 맡기며 육지에 당도하면 전하려고 했으나 귀신이 선생의 지조를 더립히지 않으려고 이러한 이변이 있게 됐다고 하니 선생이 즉시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이에 파도가 그치며 배가 나아갔다.사람들은 그곳을 투갑연(投鉀淵)이라 했으며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로 향사를 지냈는데 지금도 폐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평정공이 76세에 향리인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는데 가난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손들에게 시(詩)를 남겨 교훈으로 삼게 했다.家貧無物得支分 내 살림 가난하여 나누어 전할 것이 없고惟有簞瓢盧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珠玉滿籝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1493년(성종 13) 78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성종(成宗)은 예관으로 동부승지 이자근(李自建)을 보내어 제문을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평정공은 3남을 뒀는데 장남 경원(庚元)은 검지(檢知), 차남 승원(承元)은 통정(通政), 삼남 소원(紹元)은 이조정랑을 역임하며 명문가의 대를 이었다.육당 최남선은 이약동을 우리나라 유사 이래 최고의 청렴결백한 관리로 꼽았고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 관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언급하며 이약동이 말의 채찍을 제주도 관물이라 하여 성루에 걸어둔 괘편암과 받은 갑옷을 바다에 던진 투갑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 매계 조위는 1454년(단종 2) 봉산면 인의동에서 울진현감 조계문(曺繼門)과 문화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어려서 종숙부인 영의정 충간공과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했는데 21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수찬과 승정원 동부승지, 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등 당대의 대석학이 임명되는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던 신진사류의 지도자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홍문관 수찬으로 재임할 때에 성종의 명으로 승(僧) 의침(義砧)과 함께 당나라 두보의 시를 번역해 ‘두시언해(杜詩諺解)’를 편찬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성종은 일찍이 선생을 총애하시어 “백관중 문예는 매계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 등의 주동으로 야기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선생은 의주와 순천으로 유배돼 고초를 겪게 되는데 병을 얻어 1503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나라에 대한 애끓는 충정은 적소(謫所)에서도 변하지 아니해 유배가사의 효시(嚆矢)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하기에 이른다.“천상 백옥경이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청전이 가렸으니 구만리 먼 하늘을 꿈이라도 갈똥말똥. 차라리 죽어서 억만번 변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만분가’ 중에서)뒷날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선생의 죄를 다시 묻는다 해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거듭 당하고 3일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같은 정황과 관련해 무오사화 직전 선생의 명나라 사행길에 역관(譯官)으로 동행했던 동생 적암(適庵) 신(伸)이 요동의 점쟁이 추원결(鄒源潔)에게서 들은 “천층 물결 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 밑에서 사흘 밤을 잠들기 기다린다”는 점괘가 그대로 맞았다고 당시 유생들 사이에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 이 일화는 베스트셀러가 됐던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다뤄지고 있다.뒷날 1506년(중종원년) 중종반정 이후 선생의 죄가 사면돼 이조참판으로 증직됐고 1708년(숙종 34) 대제학이 더해지고 문장공(文莊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마암산 선영의 매계 선생 묘소 위로 자리한 어머니 문화류씨 묘역에서 수년 전 지석(誌石)이 발견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됐는데 매계와 절친했던 명문장가 호조판서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했다. 홍귀달은 지석명문에서 “매계가 내게 말하길 어머니께서 평생을 아름다운 덕으로 사셨는데 이것을 글로서 후세에 전하고자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아주시오”라 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의 매형이며 스승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매계와 더불어 강론하면 마치 큰 강물이 도도히 흘러 막힘이 없다”고 했고 선생의 절친한 벗이며 사화 때 함께 고초를 겼었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선생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오리처럼 날아오르고 그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고향 사랑 또한 각별해 바쁜 나랏일 중에도 김산 동헌이 중수되자 기문(記文)을 지어 보내고 충청감사로 재임 시 지례현을 지나다 인근의 고향땅을 생각하며 애틋한 시를 짓기도 했다.옥 같은 꽃송이 비단을 매달아 놓은 듯봄바람은 분명 한 해의 꽃소식을 관장하니정녕 올해에도 강남의 소식 있을 것이니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이미 절반은 집에 이르렀다조선 초 영남제일문향을 선도했던 김천이 낳은 큰 선비 매계 조위 선생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마 아까운 기량을 다 펴지 못하고 스러져갔으나 문화예술의 도시 김천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병자호란 의병장 충장위호군 이언의(李彦儀) 충장공 이언의는 1600년(선조 33) 성주군 신곡면(현 감천면 도평리) 진사 이낭동과 완산이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윤칙(允則)이라 했다.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라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자 6년간 여막에서 시묘를 살았는데 밤낮으로 곡을 하니 원근동에서 하늘이 낸 효자라며 칭송이 자자했다.이후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충장공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초야에 묻혀 글만 읽고 있으랴”하며 사재를 청산해 인근 동리에서 의병을 모아 크고 작은 전투에 나아가 공을 세웠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됐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도 일대의 의병과 관군 4만명이 합세해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을 지휘관으로 삼아 근왕병(勤王兵)을 구성하고 남한산성으로 진격했는데 그해 1월 3일 경기도 광주 쌍령(雙嶺)에서 청군 기병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충장공을 위시한 수많은 우리 병사들이 장렬히 전사했다.전투가 끝난 뒤 청군은 우리 군사들의 시신을 대부분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충장공의 시신도 이로 인해 수습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이로부터 3일 후의 일로 마을 뒷산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 식솔들이 나가보니 장군의 애마가 전신에 창상을 입은 채로 피묻은 투구를 물고 쓰러져 있었는데 말은 그로부터 3일 후 주인의 뒤를 따라 죽고 말았다.집안에서는 충장공의 시신도 없이 말이 물고 온 투구를 안장하는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 장사지내고 주인이 전사하자 투구를 물고 며칠을 달려 죽음을 알린 의로운 말을 기려 마을 중앙의 뒷재에 말을 묻어 의마총(義馬塚)을 만들고 의마비(義馬碑)를 세웠다. 나라에서는 호란이 수습된 후 경상도관찰사의 천거로 공신록에 충장공의 이름을 올리고 충장위호군(忠壯衛護軍)을 하사했으며 개령현감 이종상(李鍾祥)이 묘갈문을 짓고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이 영모재 기문을 닦았다.                                                                        자료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최종편집: 2025-05-10 03:40:58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제호 : 새김천신문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시민로 8, 2층 대표이사 발행 편집인 : 전성호 편집국장 : 권숙월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희연
전화 : 054-432-9100 팩스 : 054-432-9110등록번호: 경북, 다01516등록일 : 2019년 06월 25일mail : newgim1000@naver.com
새김천신문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 영상)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새김천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