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란 무엇인가?청백리는 조선시대에 선정을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양성하고 장려할 목적으로 시행한 관리 표창 제도로서 조선 개국 초기부터 실시되고 중종 대 정비됐으며 선조 대 선발 절차의 규정 등이 보완되면서 정립됐다.조선시대 선발된 청백리의 선발 사유를 보면 ‘청백’ ‘근검’ ‘경효(敬孝)’ ‘후덕(厚德)’ ‘인의(仁義)’ 등의 품행이 제시돼 있다. 대부분이 국록 이외에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할 것을 생활철학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 이 점에서 ‘청백탁이(淸白卓異: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남)’가 중요한 기준이 됐다고 하겠다. 청백리의 선발 절차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이조,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이조가 각각 왕명에 따라 경외2품 이상 관인에게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대상으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2인씩을 추천하게 하고 추천자를 육조판서가 심사한 뒤 국왕의 재가를 얻어 확정했다.청백리란 청귀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자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해 오천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 즉 소극적 의미인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아닌 적극적 의미의 깨끗한 관리를 가리킨다. 청백리들이 지켰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이며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을 매우 중요시했다. 더욱이 이것들은 국가에 대한 사명감, 왕조 체제에 대한 충성심, 백성을 위한 봉사 정신 등 개인적인 생활철학으로 정립됐고 나아가 공직자의 윤리관으로 확립됐다.오늘날에도 공무원이 청렴과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 직무에 충실하게 하기 위해 청렴결백한 관리를 표창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1981년 4월 20일 ‘국가공무원법’에 청백리상을 규정해 같은 해 5월부터 수상을 행하고 있으며 수상한 자에게는 승진 등의 특전을 주고 있다. 평정공 노촌 이약동선생의 삶과 청백리 정신이약동(李約東)의 생애이약동 선생은 1416년(태종 16) 오늘날 김천시 양천동에 해당하는 김산군 하로촌에서 해남현령을 역임한 벽진이씨 이덕손(李德孫)과 고흥유씨 사이에서 태어나 자를 춘보(春甫), 호를 노촌(老村)이라 했다. 소년기에 개령현감을 역임한 영남의 대학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했고 김숙자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계출신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다. 26세 되던 해인 1441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래 사헌부감찰(39세), 성균관직장(43세), 1441년(세종 23) 진사가 됐으며 36세가 되던 1451년(문종 1) 증광시 정과로 급제해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이 됐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다. 1458년(세조 4) 유장(儒將)으로 천거됐고 특별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됐다. 1459년(세조 5) 부모님이 연로해 사직했으나 청도군수로 봉양을 허락받고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위로부터 명망을 얻었다. 1461년(세조 7)부터는 청도군수직마저 사임하고 부모님 약을 직접 챙기며 모시기를 한결같이 했지만 다음 해 돌아가셨다. 1464년(세조 10) 상기를 마치자 선전관으로 복직됐고 이 해 종부시정을 거쳐 당상관이 돼 귀성절제사(龜城節制使)가 됐다. 1467년 4대를 이끌고 이시애(李施愛) 토벌에 참여해 종고대(終高臺), 북청(北靑)에 주둔하면서 전공을 세웠고 1468년(세조 14) 병으로 사직했으나 1470년(성종 1) 제주목사에 부임했다.1472년(성종 3)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아 문무에 두루 밝은 유장(儒將)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477년(성종 8) 사간원대사간이 돼서는 제주도민들의 고충을 익히 확인하고 온 터라 도민들의 진상품을 줄이도록 건의했다. 사냥을 줄여 도민들의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제주 백성들의 유학 교육을 위해 수령을 임명할 때 문인과 무인을 교대로 보낼 수 있도록 진언하기도 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돼 천추사의 직임을 띠고 북경에 다녀왔고 1478년(성종 9) 귀국해 경주부윤, 1482년(성종 13) 호조참판으로 중앙 정계에 돌아왔다. 1485년(성종 16) 동지중추부사가 됐으나 나이가 70세가 돼 치사하기를 여러 차례 간청했으나 성종은 허락하지 않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제수했다. 이때 도적을 체포하는 등 민폐를 제거해 민생을 안정시켰고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이 돼 한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성종의 특지로 이조참판이 됐다. 1489년(성종 20) 이조참판의 임무가 가볍지 않고 7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급이 올라 개성유수가 됐으나 나이가 직임을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결국 병을 얻은 끝에 1491년(성종 22) 사직이 허락돼 76세의 나이로 고향 김천으로 낙향했다.선생은 3남 4녀를 뒀는데 아들 셋과 사위 넷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명문가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아들은 첨지 이경원, 통정 이승원, 좌랑 이소원이고 사위는 상장군 김순성, 여윤성, 사직 김예강, 현감 강효순이다. 1493년(성종24) 78세를 일기로 이약동이 졸하자 성종(成宗)은 예관으로 동부승지 이자근(李自建)을 보내어 제문을 내리고 평정(平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후 제주 영해사와 김천 경렴서원에 제향됐으며 현재 양천동 하로서원 청백사에서 매년 음력 3월 상정일에 향사가 봉행되고 있다. 하로서원 춘향제 또한 선생의 청백리정신을 기리기 위한 청백리 백일장과 학술발표회, 김천지역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촌 이약동 청백리상 시상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통해 선생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약동청백리백일장 이약동 선생 학술발표회 이약동 청백리상 시상식이약동의 청백리정신이약동은 황감현감, 청도군수,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개성유수 등 지방관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지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제주목사로 재임한 1470년부터 3년간의 청백리적 삶은 이약동 선생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지표가 되었다. 선생의 제주에서의 행적은 ‘탐라기년(耽羅紀年)’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등 제주목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각종 역사서에 빠짐없이 이약동 목사의 선정과 청백리로서의 행적을 찬양하고 있다.이약동 목사가 부임한 직후에 아전들의 청렴을 강조하는 당시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국민권익위원회의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이야기’편에 실린 ‘공물을 가로채는 쥐는 누구인가?’를 통해 부정부패에 대한 이약동 목사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탐라지(耽羅紀年)’ 경인년(1470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목사 이약동이 한라산신묘를 세웠다. 이전에는 매번 한라산 정상에서 제를 올렸는데 얼어 죽는 자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고을 남쪽의 작은 산 아래에 묘단을 만들어 세웠다. 곧 산천단이다. 이약동은 대체를 알아 청백리로 칭송된다. 임기가 다 돼 돌아갈 때 옷가지와 말을 모는 여러 도구 등 관아에서 갖춰 쓰던 것들을 관청에 모두 두고 한 필의 말로 떠났는데 채찍은 관아의 누각에 걸어뒀다. 살피건데 공이 사냥을 나갈 때에 일찍이 채찍 하나를 지녔었는데 돌아갈 때에 이르러 이 땅에서 난 물건이라 해서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니 뒷사람이 이를 소중히 간직하여 새로운 목사가 도임할 때마다 매번 아뢰었다고 한다. 바다를 건널 때 바다 한가운데 이르러 배가 갑자기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사공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얼굴이 하얘졌다. 공이 꼼짝하지 않고 바르게 앉아 있자니 부관 하나가 앞에서 고하기를 “고을 사람들이 공의 맑은 덕성에 감동해 포갑 하나를 주면서 공의 세면도구로 갖춰 쓰게 했습니다. 아마도 신령께서 이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했다. 공이 즉시 이것을 바닷속으로 던지라 명하니 이에 순조롭게 건널 수 있었다. 뒷사람들이 그곳을 가리켜 투갑연이라고 한다.이약동 목사의 이러한 결단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의 발로로밖에 볼 수 없는 적극적인 행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매년 2월에 열리는 한라산 백록담에서의 산신제로 인해 백성들이 얼어 죽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만 채우고 떠나는 목사와 달리 사람 잘 살자고 하는 제례로 인해 사람이 얼어 죽는데 왜 산꼭대기만을 고집하는가? 라는 능동적인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이후부터 얼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하며 지금까지 제주시 아라동 곰솔공원 산천단(山川壇)에서 매년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한라산신제또한 이약동 목사가 1474년(성종 5)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돼 제주도를 떠날 때의 청렴한 행적에 대해서도 제주지역 향지와 현인달사(賢人達士)들의 문집 등에 길이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제주도 역사서인 ‘탐라지(耽羅志)’에도 당시의 상황이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이약동 목사가 1474년(성종 5) 경상좌도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돼 제주도를 떠날 때 관아에서 받은 모든 물품을 남겨두고 말을 타고 나섰다. 성문에 이르러 비로소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이 관물인 것을 알고 제주목 관아 문루 앞 바위에 걸어 놓았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삭아 내리자 고을 사람들이 채찍을 바위에 그림으로 그리고 괘편암(掛鞭岩)이라 했다고 한다. 또 출항한 배가 풍랑으로 침몰할 지경에 이르자 선생이 부정한 짓을 행한 일행이 있는지 단속하자 수행한 비장(裨將)이 제주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리 선물을 드리면 필시 목사께서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육지에 당도하면 전해달라며 맡긴 포갑을 받았나이다”라고 자백했다. 크게 놀란 이약동은 즉시 갑옷을 바다에 던지게 했더니 풍랑이 가라앉았다 해서 투갑연(投甲淵)이라는 전설을 낳기도 했다. 또 지방관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수령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행장에서 이약동 목사의 사례를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선생의 모범적인 행적은 선생 사후 제주도민사회에 아름다운 공직자상을 심기에 충분해 지금은 사라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돼 오래도록 추모되기에 이르렀다.76세에 고향인 김천 양천동 하로마을로 낙향할 때 향리에 남은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자손들에게 경계함’이라는 제목의 시가 전하는데 관직을 퇴임하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하기 전날 부인과 3남 4녀, 사위, 며느리를 불러 모아 내렸던 시로 전해진다.家貧無物得支分 내 살림 가난해 나눠 전할 것이 없고惟有簞瓢盧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珠玉滿籝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서 욕이 되거늘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리 또 정부인 완산이씨에게는 질그릇 하나를 남겼는데 고향 초가집에 구멍이 뚫려 비가 샐 때 부인이 받은 질그릇으로 빗물을 퍼내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렴 개결했고 은혜로운 정사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았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궁핍한 말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514년(중종 9)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청백리(淸白吏)를 천거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선생의 청백리 행적이 상세히 기록돼 전한다. 육당 최남선(崔南善)은 이약동 선생을 우리나라 최고의 청백리로 꼽기도 했다. 이약동 선생이 제주목사로 재임 시에 정의현 영천관에 머물 때 쓴 시가 전해진다. 영천의 지형이 아주 맑고 시원하여 사면의 기이한 경관이 나를 정신없게 한다 성판악 한라산 머리에 쌓인 하얀 눈 유감과 산귤은 잎에 봄빛을 감췄다 하늘 끝에 바다만 보여 땅은 없는 듯한데 개 짖고 닭이 울어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겠네 잠깐 잠이 든 사이 궁궐에 들어갔었는데 깨어보니 꿈이어서 섭섭하기만 하네영천관은 현재 서귀포시 상효동(정의현) 영천천 옆에 있던 관용숙소로 정의현과 대정현을 내왕하던 관리들의 숙식을 해결하고 점마(點馬)를 위해 1466년(세조12년) 이유의 목사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2015년 2월11일, 영천동주민센터와 법호동마을회가 공동으로 영천관시비를 건립했다. 영천관시비 자료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최종편집: 2025-05-10 0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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