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방(曺應邦) 정려각
창녕조씨 집성촌인 봉산면 신리 403-6번지 송정마을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의 효자 조응방(曺應邦 1695~1753)의 정려각이다. 조응방은 창녕조씨로 부친이 병석에 눕자 겨울이었음에도 3일간 눈밭에서 기도를 드렸더니 대추나무에 열매가 맺어 이것을 끓여 시탕했고 사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부인 창녕성씨도 효부로 이름이 났다. 지역의 향리들이 상소해 1812년(순조12) 정려가 내리고 1875년(고종12년) 정려각을 세웠는데 훼손이 심해 2000년 중수했다.‘교남지(嶠南誌)’ 효자편에 “조응방은 창녕인으로 효행으로서 순조 12년 정려가 내렸다”고 기록돼 있다. 또 효부편에는 “창녕성씨 부인은 효자 조응방의 처이고 시부모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해 사람들이 말하길 그 자이비에 그 처라 칭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문랑효랑(文娘孝娘) 정려각
죽산박씨 집성촌인 감천면 도평리 263-1 평산마을에 위치한 문랑효랑이효각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신원(伸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문랑, 효랑 자매의 지극한 효성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청하현감으로 대구의 권력가인 순천박씨 박경여(朴慶餘)는 명당으로 알려진 감천면 무안리 대동마을 큰골에 자신의 부친 묘소를 이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큰골은 대대로 죽산박씨의 선산이었기 때문에 박경여의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며 박수하(朴壽河)는 대구감영에 소송을 제기했다. 송사 끝에 무고로 몰려 박수하가 옥사하기에 이르자 19세인 장녀 문랑이 묘를 파내어 시신을 불태우다 박경여의 하인들에게 살해당하고 17세의 동생 효랑은 부친과 언니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남장(男裝)을 하고 상경해 1712년(숙종38년) 숙종의 어가(御駕)를 가로막고 하소연하여 암행어사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진상조사 과정에서 당사자간 진술이 엇갈려 지지부진하던 차 언니 문랑의 시신에서 창에 찔린 상처가 발견되고 전국의 유림에서 박경여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자 마침내 묘터가 죽산박씨 집안의 소유로 되돌려지고 1724년(경종4년) 자매에게 정려를 내리고 효랑에게 80결(結)의 토지를 하사했다. 효랑이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남평문씨 문우징(文宇徵)에게 시집갔다가 25세로 요절했는데 일설에는 송사판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박경여가 효랑이 합천 시댁으로 오는 날 자객을 보내어 가마행렬을 습격해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문우징의 8대손인 문석일(83세)씨를 비롯한 효랑의 시댁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효랑이 시댁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살해당한 후 시신을 운구해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효랑의 산소는 합천군 용주면 우곡리 계성마을의 남평문씨 선산의 시아버지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을 제수받은 문동도(文東道1644-1699) 묘소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영조는 효랑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매에게 친히 문랑(文娘), 효랑(孝娘)이라는 시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어제 정려명을 지어 내렸다.문헌공(文憲公)의 자손 매맞아 죽은 넋이남은 원혼을 어느 곳에 호소하랴아내는 정숙하고 딸은 효도하며 종은 충절을 다하니만고에 강상(綱常)을 밝힘에 제일가는 가문이로다.문랑, 효랑의 정려각은 원래 이 자리에 함께 세워졌었는데 1916년 효랑의 시댁인 남평문씨 집안에서 효랑의 정려각만 별도로 시댁인 합천으로 옮겼다. 효랑의 정려각은 고품리 남편 문우중의 산소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정려비는 없이 “孝女竹山朴娘子之閭”와 孝女竹山朴文娘孝娘之閭”라 새겨진 두 개의 정판만이 보존돼 있다.두 자매의 효행은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인 1934년 대구의 제일서당포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박효낭전’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출판되기도 했다. 배흥립(裵興立) 삼대삼강 정려각
조마면 신안리 1089번지 안새래마을에 있는 정려각으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배흥립장군과 모친인 경주김씨부인, 손자 배명순 등 3대에 걸쳐 정려가 내린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이다.배흥립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영산현감을 역임하고 좌찬성으로 추증된 배인범(裵仁範)과 정경부인 경주김씨 사이에서 1546년(명종1) 김산군 조마면 새래(신안)에서 태어나 자를 백기(伯起), 호를 동포(東圃)라 했다. 조모이신 한양조씨가 마당에 장군깃발이 서 있는 꿈을 꾼 후 태어났다고 전하는데 과연 기골이 장대했다 하며 5세에 외조부인 황주목사 북일(北逸) 김익(金瀷)에게 수학하면서 훗날 대사헌이 된 구봉령(具鳳齡), 영의정에 오른 유영경(柳永慶)등과 동문수학했는데 특히 병서(兵書)에 관심이 깊어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어찌 문무를 따지랴”라고 했다고 전한다.1572년(선조5)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봉직하다 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여진족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무장, 경성, 흥양 등 세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이때에 이르러 모친인 경주김씨가 병환이 깊어 머리를 빗지 못해 이가 생겨 가려움에 시달리자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옆에 누워 이가 옮겨오도록 했고 유산으로 받은 전 재산을 아우인 의범(義範)에게 주며 “나는 녹봉으로만도 충분하다”고 했다는 일화가 세상에 알려져 칭송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권율, 이순신 장군과 함께 행주, 당포, 옥포, 견내량, 진도, 칠전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고 이순신 장군의 천거로 공신에 오른 후 장흥부사와 전라도방어사,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올랐다.1605년(선조38) 선무공신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1607년 영흥부사로 나아갔다가 득병해 그 이듬해인 1608년 졸하니 선조는 예관을 보내어 조문케 하고 효숙(孝肅)이란 시호를 내렸다.뒷날 인조 때 원종공신, 병조판서, 좌찬성이 추증되고 효종 때 정려가 내렸다. 대방산 묘소 아래에 예조판서 강백년(姜栢年)의 비명(碑銘)으로 신도비가 세워지고 순조 때 삼강사(三綱祠)에 제향됐으며 한산도 승전비에 공의 공적이 기록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렸다.효숙공의 행장(行狀)은 실학의 선구자로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집필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짓고 행록(行錄)은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서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도총관 유정량(柳廷亮)이 닦았다.효숙공은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여산송씨 사이에서 4남 3녀를 두었는데 삼남 시량(時亮)이 1630년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양주목사, 도총부부총관, 경상, 충청, 전라 삼도의 병마절도사를 두루 역임했으며 공의 손자이며 장남 선무랑 시망(時望)의 차남인 명순(命純)은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 때 선전관으로서 인조를 호종하며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다 전사해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와 함께 부조지전(不祧之典/영원히 사당에 위패를 모시고 기제사를 드리는 나라의 은전)이 내렸다 효숙공의 모친인 경주김씨 또한 만고의 열부로서 남편이 병사하자 3년상을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니 1656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정경부인으로 증직됐다.배흥립의 모친인 경주김씨부인은 황주목사 김익(金翼)의 딸로 태어나 영산현감 배인범에게 출가했다. 남편이 병사하자 자식들을 불러놓고 “나는 이제 남편의 뒤를 잇고자 하니 너희들은 충의(忠義)에 살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에 들어가 1617년(광해9년) 자결했다.또 배시망(裵時望)의 차남으로 효숙공의 손자가 되는 배명순(裵命純)은 1624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병자호란때 선전관으로 인종을 호종하며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해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와 함께 부조지전(不祧之典)이 내렸다.정려각 내의 중앙에는 경주김씨부인, 왼편에는 배흥립 장군, 오른편에는 배명순 장군 등 3개의 표방(標榜)이 걸려있다.“烈婦通訓大夫靈山縣監 贈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義禁府事裵仁範妻 贈 貞敬夫人慶州金氏之閭(열부통훈대부영산현감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사배인범처 증 정경부인경주김씨지려)”“孝子嘉善大夫工曹參判 兼 五衛都摠府都摠管守知訓練院事 贈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裵興立之閭(효자가선대부공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수지훈련원사 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배흥립지려)”“忠臣 贈 資憲大夫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德源都護府使 兼 安邊鎭管同僉節制使諡忠肅公 裵命純之閭(충신 증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행덕원도호부사 겸 안변진관동첨절제사시충숙공 배명순지려)”정일(鄭鎰) 부부 정려각
조마면 장암리 587번지 새말마을에 위치한 이 정려각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진사 정일(鄭鎰)과 남편을 지키려 자결한 부인 덕산윤씨를 기리는 부부 정려각이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왜적이 마을로 들어오자 병환 중에 있던 남편 정일을 윤씨부인이 이불에 싸서 업고 마을 앞 감천 용머리 부근으로 피난했다. 왜병이 추격하자 남편을 갈대밭에 숨기고 적을 유인해 남편으로 멀어지게 한 후 감천에 투신 자결했고 뒤따라온 여종 막개(莫介)도 따라 죽었다. 사로잡힌 정일은 왜병이 회유하려 하자 “내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찌 금수(禽獸)를 따르겠느냐” 호통치며 반항하다 칼에 찔려 죽었는데 이때 정일의 나이 36세였다. 6일 후 다른 여종 계화(桂花)가 정일과 윤씨부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주인의 세 살 된 외아들을 업고 외가인 예안으로 가서 살면서 주인의 대를 잇게 했다. 1635년(인조13) 정일에게 사헌부 지평(持平)벼슬이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으며 1707년(숙종33) 윤씨부인에게도 정려가 내렸다. 원래의 정려각은 새말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감천이 범람해 수해를 입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정려각 앞에는 두 개의 작은 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주인을 위해 따라 죽은 여종 막개와 주인의 어린 아들을 키워 대를 잇게 한 계화의 비석이다.정려각 내부의 왼쪽에는 “孝烈松岩處士成均館進士烏川鄭公之閭(효열송암처사성균관진사오천정공지려)” 오른쪽에는 “節婦成均館進士孝烈鄭鎰妻宜人德山尹氏之閭(절부성균관진사효열정일처의인덕산윤씨지려)” 라고 적혀있는 정판이 걸려있다.정일은 영일정씨 사정공파 정사신의 차남으로 상주 중동면 우물리에서 태어나 자를 경중(景重), 호를 송암(松岩)이라 했으며 일찍이 조마 장암으로 이거했다. 16세인 1572년(선조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부모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효행과 학문이 알려져 각계로부터 천거됐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여이명(呂以鳴)은 1718년에 쓴 ‘금릉승람(金陵勝覽)’에서 “정일은 부친상을 당해 죽을 마시며 3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상복을 벗지 않았고 모친상에도 한결 같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잡히자 적을 꾸짖으며 저항하자 노하여 육신을 찢어 살해했다”고 적었다. 또 허목(許穆)의 제자로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대학자인 이만부(李萬敷)는 “남편은 의(義)에 죽고 부인은 절(節)로서 죽었으며 종은 충절로서 주인을 따른 예는 일찍이 드물었다”고 칭송했다. ‘조선환여승람(朝鮮環輿勝覽)’에도 “진사로 임진왜란에 몸을 던져 강직하고 굽히지 않아 순절했다. 사람들이 삼강세가(三綱世家)라 했다”고 기록했다. 박윤(朴贇) 부부 정려각
조마면 신곡리 신석동에 있는 정려각으로 사헌부 감찰로 추정된 박윤(朴贇 1723~?)과 처 함양오씨부인의 효행과 열행을 기리는 부부 정려각이다. ‘교남지’에 “박윤은 홍발(鴻發)의 후손으로 1888년(고종25) 효행으로서 감찰을 증직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순천박씨 족보에는 졸한 후 조정에서 정려를 받고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을 증직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부인 함양오씨는 개령면 덕촌리 자방마을에서 박윤의 후처로 시집와 남편 박윤이 병사하자 자결을 택한 열부로 ‘교남지’에 “함양오씨는 박윤의 처로 정순하고 덕이 있었는데 시집가서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다 남편이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상을 당하자 스스로 장례준비를 마친 후 목을 메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정판은 사라지고 없으며 비석에 “通訓大夫司憲府監察孝子順天朴公諱贇淑夫人烈婦咸陽吳氏之碑(통훈대부사헌부감찰효자순천박공휘윤숙부인열부함양오씨지비)”라 새겨져 있다. <자료제공 : 김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