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각(旌閭閣)이란 무엇일까?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건국 초부터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전국에 향교를 짓고 교육을 통해 백성들에게 충효열(忠孝烈)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대표되는 삼강오륜(三綱五輪)에 입각한 정치, 사회 질서를 형성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정려각은 성리학적 국가이념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모범으로 삼게 하기 위한 국가적 시책의 하나이다. 정려(旌閭)의 정(旌)은 임금이 백성들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신임의 증표로서 내리는 깃발을 말하며 려(閭)는 마을입구나 길에 세운 문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려라는 것은 국가시책에 부합하는 백성이나 신하에 대해 나라에서 표창의 증표로 하사하는 오늘날의 훈장과 같은 것으로서 집과 같이 건물의 형태로 세우면 정려각, 문의 형태로 세우면 정려문이라 했다.
이러한 정려는 집의 문간채 대문 위에 행적을 기록한 나무판을 걸어두거나 별도의 문을 세우기도 하며 비석이나 나무판에 행적을 적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짓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행적의 사유에 따라 충절각, 효열각, 효자각, 열녀각, 열려문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따라서 정려란 충신, 효자, 열녀가 배출된 마을이나 집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을 말한다.
정려를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사후에 후손이나 지역의 유림에서 예조에 신청을 하고 이것이 임금의 명으로 허락되면 그 증명서로서 ‘명정(命旌)이 내려진다. 명정이란 임금이 명하는 정려라는 뜻으로서 부상으로 후손이나 배우자에게 세금과 군역이 면제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직이 수여되기도 했기 때문에 가문과 마을의 큰 영예로 여겨졌다.
정려가 주로 정려각의 형태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것은 정려를 통해서 마을과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려시대 말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정려각(문)은 충효열 즉 삼강(三綱)을 근본으로 삼은 유교가 국시로 전면에 등장한 조선시대에 들어 급속히 건립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정한 국가에서 유교의 핵심 덕목인 충·효·열을 백성들에게 장려하고자 모범을 보인 백성들의 사례를 정려라는 형태의 시각적인 표창상징을 통해 본을 받게 하고 이를 통해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영남제일문향으로 불린 김천 지역에도 무수한 역사인물이 배출된 만큼 흥미로운 사연이 담긴 다양한 형태의 정려각이 존재한다. 그러면 김천의 정려각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 주> 김천의 정려각조선시대에 건립된 전국의 정려각은 1천968개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김천에는 확인된 정려각이 15개소였으나 2개소가 근년에 공사 등으로 훼철되고 현재 13개소가 전한다. 성격별로는 효행이 5개소, 열행 3개소, 효열 3개소, 충열 2개소, 충효 1개소, 충효와 열행을 함께 기리는 것이 1개소 등이다.지역별로는 봉산면과 조마면이 각 3개소, 농소면, 대덕면, 개령면, 어모면, 감천면, 구성면, 지례면, 부항면, 남면이 각 1개소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 정려각
농소면 봉곡리 샙띠마을에 있는 김해김씨정려각은 경주이씨 이종화(李鍾華)의 처인 김해김씨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내린 열려각이다.김해김씨부인은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해 칭송이 끊이지 않았고 남편이 병이 들자 지극으로 간병하다 임종직전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다.남편의 시신을 입관하는 날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어찌 사사로운 힘으로 용납할 수 있으리요. 내가 죽으면 남편과 함께 묻어주오”라고 유언한 후 자결했다.부인의 열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아들 이기연이 나라에 상소해 1847년(헌종13년) 정려가 내리고 일가친척의 부역이 면제됐다. 1853년 정려각과 정려비가 세워졌다가 개축됐다. 정려각 내부에는 현재 비석과 정판 등이 사라지고 없다.박몽열(朴夢說) 부부 정려각
대덕면 중산마을에서 다화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변의 속칭 박바우모티이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박몽열과 부인 문화류씨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박몽열(朴夢說 1555~1597)은 황간현감 재임 시 임란이 발발하자 황간, 개령, 상주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문화유씨부인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자 8세이던 아들 박영백(朴英伯)을 두고 자결을 택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다가 뒷날 우암 송시열이 ‘한준고사(韓俊古事)’에서 부부의 충절과 열행을 기록한 것이 밝혀져 1882년 뒤늦게 정려가 내리고 다화마을 앞에 정려각이 세워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정려각 내에는 “通政大夫黃間縣監 兼 淸州鎭管兵馬節制使 朴夢說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者(통정대부황간현감 겸 청주진관병마절제도위 박몽열 증가선대부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자)”와 “贈兵曹參判密陽朴夢說妻 贈貞夫人文化柳氏之閣(증병조참판밀양박몽열처증정부인문화류씨지각)”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성산이씨(星山李氏) 정려각
개령면 덕촌리 자방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각으로 시부모에 대한 효와 남편에 대한 열행을 몸소 실천한 성산이씨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효열각이다.부인은 병자호란 때 전사한 감천면 도평리 출신 의병장 이언의(李彦儀)의 따님으로 자방마을 함양오씨 오여권(吳汝權)에게 시집왔다.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했고 남편이 병사하자 우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암행어사가 개령지방을 순시하다 이 소식을 듣고 장계를 올려 1737년(영조13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 어모면 다남동 오청계(동산마을이라는 설도 있음)마을에 정려문을 세웠다. 1840년 자방마을 앞으로 옮겼고 1962년 중수하면서 비를 세웠으며 2005년 새로 단장했다. 정려각 내 표방(標榜)에는 “烈婦學生吳汝權妻星山李氏之閭(열부학생오여권처성산이씨지려)”라 적혀있다. 1737년 현감 최주하가 오여권 후손의 부탁으로 쓴 정려문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열부이씨는 오여권에게 시집가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시어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는데 남편이 병들자 지성으로 간호했으나 끝내 죽었다. 세 살 난 자식이 있었으나 깊은 우물에 빠져 자결했다. 이러한 사실을 관아에 알렸지만 60년이 지났다. 영조6년에 삼강이륜의 실행자를 전국에 조사할 때 이씨의 효열이 보고되고 박문수가 현지답사해 관찰사를 통해 보고하자 1737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이후 손윤성, 윤정이 현감에게 청하니 나이 80에 이르러 붓을 던진지 오래지만 그 정성이 갸륵해 이 글을 쓴다.”강우창(姜遇昌) 정려각
어모면 옥율리 노리기마을 출신으로 광해군 때의 효자 진주강씨 강우창(姜遇昌)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강우창은 부친이 병들자 수시로 대변을 맛보아 병환의 위중을 헤아렸고 병세가 위중할 때마다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리웠는데 끝내 부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전하는 바에 따르면 날마다 무덤에 엎드려 통곡을 하느라 바닥에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강우창이 사망한 후 200년 뒤인 1862년(철종13년) 지역 유림의 청원으로 정려가 내렸다.영천이씨(永川李氏) 정려각
봉계로 통칭되는 봉산면 신리 마을 입구에 있는 영천이씨부인의 열행을 기리는 열녀각이다.영천이씨부인은 1570년 찰방 이대유(李大有)의 딸로 태어나 영일정씨 정유한에게 시집왔다.정유한은 통덕랑(通德郞)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마을에 들어오자 시부모를 모시고 마을 뒷산으로 피난갔다가 뒤따라온 적에게 붙잡히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가슴을 찔러 자결했다.1633년(인조11년) 나라에서 정려가 내리고 다음해인 1634년 비석과 정려각을 세웠다. 후손들이 정려각 앞에 샘을 파고 부인의 절개를 본받자는 뜻으로 절의천(節義泉)이라 이름했다. 1892년(고종29년) 남편 정유한에게 이조참의, 영천이씨부인을 숙부인으로 추증했다. 2000년 영천이씨정려각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7호로 지정됐다.
김시창(金始昌) 정려각
봉산면 신암리 662번지 고도암마을 입구에 있는 정려각으로 해풍김씨 남정 김시창을 기리고 있다. 김시창은 1472년(성종3년) 대항면 덕전리 개울마에서 태어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고도암으로 이거해 살았다. 1515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위협함에도 태연했고 공의 효행에 감화된 호랑이가 주변을 지켜주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김안국과 조광조의 추천으로 벼슬이 제수됐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성종, 중종, 인종 세 임금의 국상 때마다 3년간 상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절을 해 충절로 이름이 났다. 1558년(명종13년) 86세를 일기로 졸하자 효절(孝節)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려가 내렸다. 처음에는 고향인 개울마에 정려각이 세워졌는데 한국전쟁 때 파괴되자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 정려각 내부 정판에는 “賜號孝節金始昌之閭(사호효절김시창지려)”라 새겨져 있다.김시창은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해풍김씨의 시조인 해풍부원군 김숭선(金崇善)의 후예로 조부는 사직(司直)벼슬을 지낸 정효신(鄭孝信)이다. 1472년(성종3년) 대항면 대룡리에서 부친인 정의(鄭○)와 모친인 하산조씨 사이에 태어나 자를 정양(鄭楊), 호를 남정(嵐亭)이라 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고도암마을로 이거했는데 15세 되던 해에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감찰과 덕원부사를 지낸 송숙기(宋叔琪 1426~1489)를 만나 인생의 나아갈 길을 물으니 “천성을 지키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인 ‘存養省察(존양성찰)’ 네 글자를 적어주어 공은 이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515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포효함에 문중 어른들이 모두 호환이 두려워 시묘 중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태연자약했고 뒤에 호랑이가 공을 태워 주기까지 하니 주위에서 호랑이까지 감화시킨 큰 효자가 나왔다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1518년(중종13년)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과 1519년 조광조(趙光祖)가 효행과 학행을 예로 들어 연이어 현량과로 추천돼 제릉참봉과 사직서 참봉 벼슬이 제수됐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당시 벼슬을 사양하며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니 부끄럽고 두렵다. 오늘에 이르러 두 번이나 왕명으로 불리어 영광은 비록 지극하나 나의 분수를 헤아려보니 돌아올 이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맑은 조정의 공기를 더럽힐 뿐이다.”또 남취정(嵐聚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비들과 학문을 논했는데 어느 날 지역출신으로 당대의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위(曺偉)와 이약동(李約東)이 방문하자 “좋은 자연의 경치를 그대들과 함께 평생토록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과 벗하며 살고 있음을 오히려 당당해했다. 공은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는데 관리가 아니면서도 성종, 중종, 인종이 승하한 국상 때마다 3년간 상복을 입고 예를 갖췄다. 특히 중종임금이 승하하자 70이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날마다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사사(賜死)될 때 공의 아들이 연루돼 유배를 가자 세상과 단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평생 관직에 나아기지 않았음에도 높은 학문으로 김종직, 조위 등과 함께 영남사림파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1558년(명종13년) 86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명종임금은 예관을 보내어 애도하고 효절(孝節)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 유곡도찰방을 지낸 송량(宋亮)이 행장을, 성균관대사성 정유번(鄭維藩)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묘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는데 비석은 모두 사라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후에 공의 위패가 김천의 경렴서원과 황간의 송계서원에 배향되고 그 행적이 정조 때 간행된 ‘삼강록(三綱錄)’에 수록됐다. <자료제공 : 김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