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불어닥친 코로나19로 인해 봄의 향연을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도 잠시 어느덧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여름의 문턱에 들어섰다. 방역당국의 적극적인 대처와 전국민적인 협조 속에 코로나19도 완전하지는 않으나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서서히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펴기 시작했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예부터 삼산이수의 고장으로 불리며 흥미로운 전설과 역사,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김천의 숨은 명소를 찾아 힐링여행을 떠나보자. 비운의 왕비 인현왕후의 은거지로 유명한 청암사수도산 자락 인현왕후길과 조선중기 영남예학을 집대성한 한강 정구 선생의 선비정신이 깃던 수도계곡의 무흘구곡이 대표적이다. 또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고 의승병장으로서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이 스민 사명대사길과 공자를 흠모하며 마을 지명 곳곳에 공자와 관련된 마을이름을 새긴 공자동 일대 계곡의 유래와 비경도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로서 손색이 없다.
비운의 왕비가 거닐던 ‘인현왕후길’인현왕후길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018년 8월 걷기 좋은 길로 선정되기도 한 대표적인 김천의 트레킹 코스로서 천년고찰 청암사, 수도계곡의 절경과 어우러져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인현왕후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으나 증산면 수도리 마을 뒤 수도암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시작하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소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 침엽수림과 다양한 활엽수 군락, 크고 작은 계곡을 넘나들다 보면 청암사와 용소폭포 방향으로 나뉘는 삼거리 지점에 있는 정자에 닿을 수 있다. 이곳에서 폭포방향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한다면 9Km정도 거리로 넉넉잡아 2시간 30분 정도면 용소폭포까지 내려올 수 있다. 용소폭포에 도달해 최근 개통한 출렁다리를 거쳐 웅장한 폭포를 감상하는 것은 인현왕후길이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이다.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수백여년 전 서인으로 강등되어 울면서 청암사로 은거해 복위를 꿈꾸던 인현왕후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을 떠올려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인현왕후길>비운의 왕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肅宗)의 계비(繼妃)로 본관은 여흥민씨이다. 아버지는 노론인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서인의 거두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1680년(숙종6) 인경왕후가 죽고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송시열(宋時烈)의 추천으로 1689년 왕비가 됐다. 왕자를 낳지 못해 왕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1688년 숙원장씨(淑媛張氏)가 왕자 윤(昀) 후일의 경종을 낳으면서 갈등이 심해졌다. 1689년 숙종이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극렬히 반대하면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이어지고 남인이 집권하면서 숙원장씨는 희빈(禧嬪)이 됐다. 인현왕후는 남인들의 주장으로 폐위돼 서인으로 강등된 후 4년간 청암사에 은거했다. 1694년 폐비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 다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됐다. 1701년 35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 경기도 고양의 명릉(明陵)에 숙종과 함께 묻혔다.
<인현왕후>인현왕후의 청암사 생활 (1689-1694)장희빈의 모함과 인현왕후를 후원하며 왕권을 위협하는 서인세력의 권력비대화를 막고자 하는 숙종의 정치적 이해가 작용한 가운데 인현왕후는 1689년 서인으로 강등돼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남인세력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어머니 은진송씨부인의 외가와 인연이 닿아있는 성주(현 김천시 증산면 청암사 일대는 1914년까지 성주에 속했음) 수도산 청암사로 피신해 4년간 은거했다. 절에서는 방문객들로부터 민씨를 보호하기 위해 법당 맞은편 개울 너머에 사대부가 양식의 극락전과 남별당을 신축하는 등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42수관세음보살을 모신 보광전을 지어 복위기도처로 제공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외가에서 보내준 시녀 한명을 데리고 살면서 기도를 드리거나 수도산 곳곳을 다니며 시문(詩文)을 짓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1694년 숙종이 남인세력을 몰아낸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위된 후 청암사에 보낸 친필 편지에서 “내가 청암사 큰스님의 영험한 기도덕분으로 복권됐다”라며 청암사를 품고 있는 수도산을 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전답을 하사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훗날 극락전을 중창할 때 발견된 ‘시주록(施主錄)’에는 궁중상궁 26인의 이름이 올라있어 정치적 격변기에 노회한 궁중여인들이 인현왕후가 훗날 복위할 것에 대비해 청암사에 시주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인연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궁중여인들이 청암사를 출입하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청암사>인현왕후의 흔들리는 남자 숙종(肅宗) (1661-1720)숙종은 조선의 제19대 왕으로 부왕인 현종의 뒤를 이어 1674년 13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일찍이 판단이 명석하고 예리해 성년이 되기 전까지 대비가 수렴청정하던 관례를 깨고 직접 통치에 나섰다. 숙종의 재위 기간은 양란으로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남인과 노론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숙종은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성정권을 일시에 몰아내고 소외됐던 당파를 정치수반에 등용하는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을 사사하고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를 계비로 삼은 경신환국, 희빈장씨가 낳은 왕자를 원자로 삼자 반발하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사사하고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기사환국, 인현왕후 폐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전교를 내려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갑술환국이 그것이다.겉으로는 궁중여인들의 암투와 숙종의 변덕으로 보이지만 실은 두 여인이 속해있는 붕당(남인, 서인)을 교대로 등용해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재위기간동안 큰 치적을 남겼으나 야사에서는 두 여인의 가슴에 큰 대못을 박은 비정한 남자로 기억되고 있다.인현왕후의 맞수 장희빈(張禧嬪) 1659-1701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왕인 숙종(肅宗)의 2년 연상빈(嬪)으로 제20대 경종의 어머니이다. 인동장씨로 본명은 옥정(玉貞)이며 남인계열인 역관(譯官) 장형(張炯)과 어머니 윤씨부인 사이에서 1659년 태어났다. 대대로 역관에 종사한 중인집안으로 당숙인 역관 장현(張炫)은 당대 최고의 부호로 남인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1세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고 가세가 기울자 궁녀가 돼 대왕대비전(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 침방나인이 됐다. 두 살 연상이고 신분이 미천한 장나인을 숙종이 가까이하는 것을 알아챈 대왕대비에 의해 출궁됐다가 대왕대비 사후 다시 입궁해 1689년 숙원(淑媛)에 봉해졌다. 1688년 소의(昭儀)로 승차한 해에 숙종의 장남 윤(昀)을 낳았다. 숙종이 1689년 윤을 원자로, 장숙원을 희빈(禧嬪)으로 책봉하자 인현왕후를 지원하는 서인세력이 극렬 반발했고 이에 숙종은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중전에 봉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폐비가 다시 중전으로 복위되고 중전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됐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 숙빈최씨가 숙종에게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굿을 했다고 고해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했다. 숙종은 자진을 거부하는 장희빈의 입을 벌리게 하고 문짝을 떼어 가슴을 누른 채 세 사발의 사약을 먹여 죽게 했는데 향년 43세였다. 일설에는 이때 저항하던 장희빈이 세자의 남근을 당겨 훗날 경종이 후사를 두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고도 한다. 장희빈은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에서 국모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사극에서 가장 사악한 후궁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시 남인과 서인의 권력다툼과 남편 숙종의 비정한 통치술 속에서 희생된 가련한 여인일 따름이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에 홀로 안장돼 있다.영화와 드라마 통해 본 인현왕후숙종을 중심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펼치는 사랑과 질투, 음모와 극적 반전은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돼왔다. 궁중 암투와 비극적인 사랑, 드라마틱한 줄거리는 시대와 세대, 성별을 불문하고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961년 개봉한 ‘요화 장희빈’에서는 인현왕후에 조미령, 장희빈에 김지미, 숙종에 김진규가 주연을 맡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1968년의 임권택감독의 ‘장희빈’은 태현실과 남정임,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고 70년대 들어서는 TV드라마로 제작되기 시작해 1971년 MBC ‘장희빈’에서 김민정, 윤여정, 박근형이, 1981년 MBC ‘여인열전-장희빈’에서는 이혜숙, 이미숙, 유인촌, 1988년 MBC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에서 박순애, 전인화, 강석우가 주연을 맡았다. 또 1995년 SBS ‘장희빈’에서 박선영, 김혜수, 전광열이, 2010년 MBC ‘동이’에서는 박하선, 이소연, 지진희, 2013년 SBS의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홍수현, 김태희, 유아인이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종 역을 맡는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거쳐 가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현왕후나 장희빈, 숙종 역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한강 정구선생의 선비정신이 깃던 ‘무흘구곡’대가천, 옥동천, 수도계곡으로 불리며 수도산에서 발원해 풍부한 수량과 기암괴석과 단풍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김천의 대표적인 자연경관으로 증산면은 1914년 이전까지는 성주땅이었다. 주변에 청암사와 수도암 등 고찰이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이자 예학자로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이 성주에서 영남 남인학파의 종주로 활동할 당시에 중국 남송 주희의 시(詩) ‘무이구곡’을 본따 수도계곡의 절경지 아홉 곳을 7언절구의 시로 노래했으며 구곡 중 현재 성주군 관할에 1-5곡, 김천시 관할에 6-9곡이 있다. 2010년 한국관광공사 3대 문화생태 관광기반조성사업의 전략사업으로 무흘구곡 경관가도조성사업이 선정되면서 시작돼 총사업 연장 35.7Km 중 김천시 사업구간 10.3Km, 117억원의 사업비로 구곡전시관과 도서관, 체험실, 놀이방을 갖춘 무흘구곡전시관과 오토캠핑장, 야영장, 물놀이장, 출렁다리 등을 설치하고 2018년 전체 사업이 마무리됐다.
<무흘구곡전시관>무흘구곡(武屹九曲) 일곡 봉비암(一曲 鳳飛巖)일곡탄두범조선(一曲灘頭泛釣船) 첫째구비 여울에다 낚시배 띄우노라풍사요요석양천(風絲繞寮夕陽川) 석양 냇가 바람에 흔들리는 낚시줄 뉘 알랴수지연진인간염(誰知涓盡人間念) 인간세상 온갖 생각 다 버리고유집단장불만연(唯執檀獎拂晩煙) 박달삿대 짚고서 저녁안개 헤치는 걸이곡 한강대(二曲 寒岡臺)이곡가주화작봉(二曲佳姝化作峯) 둘째구비 아름다운 봉우리가 되었다는 곳춘화추엽정장용(春花秋葉( )粧容) 봄꽃 가을낙엽 단장도 고울시고당년약사영균식(當年若使靈均識) 이럴 때 이 경관을 영균이 알았더라면첨각이소설일중(添却離騷說一重) 이소경에 한 구절 덧붙혀 말했으리삼곡 무학정(三曲 珷鶴亭)삼곡수장차학선(三曲誰藏此壑船) 셋째구비 누가 배를 이 산골에 감추었나야무인부이천년(夜無人負已千年) 밤에도 훔쳐갈 이 없이 천년을 지났네대천병섭지하한(大川病涉知何恨) 대가천 건너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마는용제무유지자련(用濟無由只自憐) 건네주지 못하니 홀로 안타깝구나사곡 입암(四曲 立巖)사곡운수백천암(士梏雲收百尺巖) 넷째구비 백척바위 바위에 구름 걷히고암두화초미풍삼(巖頭花草帶風鬖) 바위 위 꽃과 풀은 바람에 나부끼네개중수회청여허(箇中誰會淸如許) 그 누가 이런 맑음 알겠는가제월청심영락당(霽月天心影落潭) 중천의 맑은 달은 맑은 못에 잠겨있네오곡 사인암(五曲 捨印巖)오곡청담기허심(五曲靑潭幾許深)다섯구비 맑은 못은 그 깊이가 얼마인가담변송죽자성림(潭邊松竹自成林) 못가의 솔과 대나무는 저절로 숲을 이루었다.복건인좌고당상(幞巾人座高堂上) 복건 쓴 사람은 단위에 높이 앉아강설인심여도심(講說人心與道心) 인심과 더불어 도심을 강론하네육곡 옥류동(六曲 玉流洞)육곡모자침단만(六曲茅茨枕短灣) 여섯구비 초가집이 물굽이를 베고 누워세분차격기웅관(世紛遮隔機重關 세상의 근심걱정 몇 겹으로 막았네고인일거금하처(高人一去今何處) 고고한 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풍월공여만고한(風月空餘萬古閑) 바람과 달만 남아 더없이 한가롭다
<옥류정>칠곡 만월담(七曲 滿月潭)칠곡층만요석탄(七曲層巒遼石灘) 일곱구비 산 겹겹 돌 여울을 둘렀는데 풍광우시미증간(風光又是未曾看) 이런 절경은 예전에 본적이 없네산령호사경면학(山靈好事驚眠鶴) 산신령의 장난에 학이 놀라 깨어나니솔로무단낙면한(松露無端落面寒) 솔잎에 맺힌 이슬 얼굴에 떨어져 차갑구나팔곡 와룡암(八曲 臥龍巖)팔곡피금안익개(八曲披襟眼益開) 여덟구비 마음을 여니 눈앞이 활짝 열리고천류여거부여회(川流如去復如廻) 흐르는 냇물은 다시 돌아 나오고연운화조혼성취(煙雲花鳥渾成趣) 구름꽃과 새에 홀연히 빠져불관유인래불래(不管遊人來不來) 오는 이 있고 없고 관여할 바 아니라네구곡 용추(九曲 龍湫)구곡회두갱위연(九曲回頭更喟然) 아홉구비 고개 돌려 지난 일을 생각하니아심비위호산천(我心非爲好山川)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다.원두자유난언묘(源頭自有難言妙) 오묘한 진리를 어이 말로 다하리오사차하수문별천(捨此何須問別天) 이곳을 버려두고 어디 가서 물어야 하나
<용추폭포>무흘구곡의 종착지이자 최고의 절경지로 손꼽히는 용추폭포는 높이가 17미터, 선녀탕으로 불리는 물구덩이 깊이가 3미터로 옛날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실제로 폭포 바위절벽에 흰색으로 용의 형상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또 옛날 수도암에서 종을 훔쳐 도망가던 도둑이 발을 헛디뎌 종이 폭포로 떨어졌는데 이후부터 비오는 날마다 종소리가 울린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사명당의 호국정신이 스민 ‘사명대사길’사명대사길은 직지사에서 출가하고 주지를 역임하며 임진왜란을 맞아 의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직지사 일대에 조성된 산책길이다. 직지사 북암에서 기날저수지를 경유해 직지문화공원으로 연결되는 코스와 북암에서 직지문화공원과 파크호텔로 이어지는 코스 등 세 갈래 길이 있다.천왕문 앞 돌이 맺어준 사명대사와 신묵대사의 인연“천왕문 앞 은행목에 황룡이 연신 꿈틀 댄다.” “꿈이었구나.” 잠에서 깨어난 신묵은 자기 평생 처음 참선 중 잠이 든 것이 내심 깨름직했다.”잠에서 깨어난 신묵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꿈에 보았던 천왕문 앞 은행목으로 향했다. 신묵과 소년 사명당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직지사 금강문과 천왕문 중간에는 넓직한 돌 하나가 덩그러니 벚나무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돌이 임진왜란 때 의승병을 조직해 왜병을 물리치고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수천에 달하는 조선포로들을 구출해오는데 기여해 호국선사로 알려진 사명대사의 출가와 인연이 있는 유명한 돌이다. 사명대사(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풍천임씨(豊川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3세 때에 김천에 은거하고 있던 황희의 현손인 황여헌(黃汝獻) 문하에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15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6세 때에 부친을 여의게 되자 공부에 뜻을 접고 방황을 거듭한다. 직지사에 놀러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 돌을 발견하고 앉았다가 낮잠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대웅전에서 참선을 하던 주지 신묵대사도 낮잠이 들었다. 신묵(信黙)은 꿈에 황룡이 나타나 천왕문 앞 은행나무를 감싸고 있는 꿈에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그 자리로 가보니 한아이가 돌 위에서 잠이 들어있었고 양친을 여위고 괴로워하던 소년은 신묵에게 출가를 소원하니 신묵은 자신의 꿈에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아이를 거둬 제자로 삼았다. 직지사로 출가해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소년은 18세에 승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30세에 신묵의 뒤를 이어 직지사 주지가 됐다. 사명당이 직지사 주지로 임명되자 직지사로 돌아와 지은 ‘귀향(歸鄕)’이라는 시에 당시 직지사의 사세와 자신이 출가했던 직지사에 대한 진솔한 소회가 잘 담겨져 있다. 열다섯에 집을 나서 서른 되어 돌아오니긴 시냇물은 의구하게 서쪽에서 흘러오네감나무다리 동쪽 언덕에 무성한 버들은 절반이나 산승이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다사명당은 32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사명대사 휴정(休靜)을 찾아가 제자가 됐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서 명승을 떨쳤는데 사명당이 임진왜란을 맞아 출병하며 지은 시에 우국충정의 심정이 녹아있다.하늘은 이미 추워지고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붉은 머리 푸른 옷 승병들이 종횡으로 달려간다어육(魚肉)이 된 백성이 노상에 송장되어 베개하고 누웠네통무하고 통곡함이여 날은 저물고 산은 푸르기만 하구나요하는 어디메요 임 계신 곳 바라보니 하늘 끝이 아득하다공자를 향한 지극함이 지명으로 탄생한 ‘공자동계곡’<공자동(孔子洞) 마을지명에 담긴 선비정신>김천시 대항면 대성리로 속하는 공자동은 1670년경 경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세 선비가 세상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의기투합하고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물색하던 중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공자동은 이회(李晦)라는 선비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공자의 화상을 구해와 공자동의 자택에 모시고 있었다 해서 마을명을 공자동이라 했다 하며 전국 어느 곳에도 이같이 성인(聖人)인 공자의 이름을 직역한 사례는 없다. 또 마을 앞 하원천 바위 위에 누대를 쌓고 안연대(顔淵臺)라 이름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곤 했는데 안연은 공자의 가장 촉망받던 제자인 안회(顔回)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숭상되는 인물이다.공자동 계곡으로도 불리는 벽계천(碧溪川) 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공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이름들이다.‘공자동(孔子洞)’, ‘창평(昌平)’, ‘주공(周公)’, ‘안연대(顔淵臺)’, ‘백어(伯魚)’, ‘명덕(明德)’, ‘저익촌(沮溺村)’, ‘문도동(聞道洞)’, ‘상좌원(上佐院)’, ‘모성암(慕聖巖)’ 등이 그것이다. 김천은 16~17세기 지례향교와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선비문화가 발전했는데 군자는 요산(樂山) 요수(樂水)라 해서 산이 높고 물이 맑은 절경지를 찾아 이상향으로 삼았다.이 고장 선비들은 공자동 계곡을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 황남별곡(黃南別曲), 구곡단가(九曲短歌) 등의 시와 가사 등으로 노래했다. 상좌원의 선비 이민관(李民觀)은 자신의 호를 모성(慕聖)이라고 지어 공자를 사모하면서 구곡단가(九曲短歌)를 지어 노래했다. 제1곡 모성암(상좌원), 제2곡 문도동(들은들), 제3곡 저익촌(지리대), 제4곡 영귀반(명덕), 제5곡 백어촌, 제6곡 안연대, 제7곡 자하령(창평), 제8곡 공자동(대성동), 제9곡 주례동이다. 공자동을 중심으로 산재한 마을 지명을 통해 공자를 숭모(崇慕)하며 철저한 유학자적 삶을 살고자 했던 옛 김천 선비들의 높은 도덕적 신념을 읽을 수 있다.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의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에 시가 전한다.
<모성정>공자동(孔子洞) 海東元氣育仙靈 우리나라의 원기가 신선을 자라게 하니 洙泗眞源次第淸 유가의 참된 근원이 청나라에 버금가네 萬年檀杏風猶在 만년 행단의 풍속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入洞如聽木鐸聲 마을 들어오면 목탁 소리 들리는 듯하네창평(昌平)대항면 대성리에 속하는 창평마을은 1750년 강릉유씨 한 선비가 정착한 이래 대대로 강릉유씨 집성촌을 형성해왔다. 창평은 공자(孔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 창평향(昌平鄕)에서 따온 이름으로 당시 선비들이 얼마나 공자를 흠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공(周公주공마을은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周禮里)로 속한다. 주례(周禮)는 중국 춘추시대 주공(周公)이 유교예법을 정리해 기록한 책으로 전하며 주공은 문왕의 아들로 주나라 왕실의 예법을 정비해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한 인물이다. 주례와 주공이라는 마을명은 유교적 예법에 따라 도덕적 삶을 살겠다는 선비들의 신념을 읽을 수 있는 지명이다.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은 공자동 일대의 절경지를 아홉 곳으로 나눠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이란 시를 지었는데 여덟 번째 시에 주공동이 나온다.주공동(周公洞) 零雨初晴四月天 비 내린 뒤 처음 말게 개인 4월 하늘은 東歸行色此山川 동쪽으로 돌아가려는 행색 이 산천이네 招來崍口耕田者 밭가는 사람을 산 입구로 불러내려 하니, 吐握如今閱幾年 토악은 지금에 몇 년이나 지난 듯하네저익촌(沮溺村)구성면 상거리로 속하는 저익촌(沮溺村)은 김녕김씨집성촌으로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증손인 김숙연(金淑蓮)이 상주 관노로 있다가 목사의 배려로 피신하여 은둔한 마을이다. 저익촌(沮溺村)은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사람을 찾아 다니기보다 그릇된 세상을 피해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의 고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장저와 걸익은 밭을 갈고 있다가 제자인 자로(子路)를 시켜 길을 묻는 공자에게 자신의 뜻을 펴겠다며 사람을 피해다니는 공자의 행태를 꾸짖었다는 인물로 평생을 은둔하며 몸소 예를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의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이란 시에 저익촌이 나온다.저익촌(沮溺村)消消今世幾人回 소소한 지금 세상에 몇 사람이나 돌아오려나 厲揚高談嘆通衰 엄숙히 고담을 나누며 쇠함을 탄식하고 애통해하네 下食瓢瓜何意思 내려와 표주박에 오이를 먹으니 무슨 뜻인가? 耦耕遺處問津臺 나란히 밭 갈은 곳을 따라 나루터에 물으러 오네 백어(伯魚)구성면 상거리에 속하는 백어(伯魚)마을은 공자의 아들인 공리(孔鯉)의 자(字)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을이 공자동 남쪽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훌륭한 가르침을 이어 받고자 하는 뜻으로 공자의 아들 공리의 자(字)인 백어(伯魚)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은 공자동일대의 절경지를 아홉 곳으로 나눠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이란 시를 지었는데 네 번째 시에 백어동이 나온다. 백어동(伯魚洞) 趨庭當日按瑶絃 추정하던 당일에 아름다운 줄을 타니, 詩禮遺風問幾年 시예의 풍속이 남겨짐이 몇 해이던가? 一扶尼岑靑末了 일부 이잠(尼岑)에 푸르러 개지 않고 兩三家往鎖寒烟 두 세집을 지나니 찬 연기가 잠겨있네명덕(明德구성면 상거리로 속하는 명덕(明德)마을은 유교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와 백어(伯魚), 주공(周公)으로부터 유래한 마을들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윤리에 맞는 행실을 통해 덕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덕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입구 바위에는 대학지도 재명명덕(大學之道 在明明德)하며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에서 나온 지선(止善)이 새겨져 있다.벽계(碧溪구성면 상거리로 속하는 벽계(碧溪)마을은 공자(孔子)와 백어(伯魚), 주공(周公) 등 유교의 성인들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따라 도덕적 삶을 영위하고 학문에의 무한정진을 통해 마침내 푸른빛이 도는 맑은 시내와 같은 정신세계에 이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도동(道洞)구성면 상좌원리로 속하는 도동(道洞)은 원래 문도동(文道洞)이었던 것이 축약된 것으로 인근의 상원, 상좌원과 함께 대표적인 연안이씨 집성촌이다. 도동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조문도석사가의(朝文道夕死可矣)’ 즉,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에서 따온 것이다. 도동(道洞)이라는 지명 속에는 주공과 주례, 공자동, 창평, 백어, 명덕, 벽계,저익촌 등의 지명을 통해 스며든 옛 선비들의 유학자적 의지가 결정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이념의 실현공간으로서 도동서원(道洞書院)을 창건해 미래의 유학자를 양성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호상(湖上) 여석홍(湖上 呂錫洪)의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이란 시에 문도동이 나온다.
<도동서원>문도동(聞道洞) 溪柳悠揚排俗塵 시냇가의 버들 휘날리며 속세의 티끌을 물리치고, 麥天朝雨動詩新 보리의 계절 아침에 비 내리니 새 시상 일어나네. 村名聞道魯何意 마을 이름 문도이나 노(魯)나라 생각지 않았고, 任杖徘徊憶古人 지팡에 몸을 맡기고 배회하며 고인을 그리워하네.모성암(慕聖巖)구성면 상좌원 마을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옛 이름은 굴암(屈巖)이었는데 1697년에 모성암(慕聖巖)이라 개칭했다. 초당(草堂) 이장원(李長源)의 장구지소(杖屨之所)로서 바위와 산수가 아름다워 구곡단가와 여석홍의 공자동구곡 제1곡에서 나오며 황남별곡에도 백장층암이 기이(百丈層巖 奇異)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선비 이민관(李民觀)은 그의 호를 성암(聖岩)이라 했고 후에 연안이씨 후손들이 모성암 바위 위에 모성정(慕聖亭)을 지어놓고 공자를 숭앙하고 있다.모성암(慕聖巖)老石迎人 廬一廬 주렴 친 초갓집에 늙은 바위 나를 맞아媧磨骨格 至今餘 여와씨가 다듬은 골격 지금까지 남아있네前行曲曲 奇觀在 앞길 구비마다 기이한 경치 펼쳐있어杏壇絃歌 出洞疎 행단의 현가가 밖으로 나오게 하네
*자료 제공: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