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조 때 어느 궁녀가 병자호란의 상황을 군사로부터 듣고 기록한 ‘산성일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1636년 11월 24일, 인조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때의 일화를 적은 것이다.
24일에 큰비가 내리니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옷을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아 임금이 세자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어 가로되 “오늘 이렇게까지 이른 것은 나와 아들이 함께 죄를 지었음이니 이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려 주소서.”여러 신하들이 안으로 드시기를 청하였지만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더니, 얼마 있지 않아 비가 그치고 날씨가 차지 아니 하니 성중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이 글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양식을 일반 상식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임금이 따뜻한 방안에 들어가 편히 쉰다고 해서 어느 백성이 임금을 원망하거나 탓하겠는가? 포근하고 따뜻한 곳에서 복을 누리는 일이 법에 어긋나는 일은 더욱 아니다. 다만 그저 진심에서 우러나온 백성을 위하는 마음일 뿐이다. 임금은 나라의 최고 어른으로 최상의 대우를 받는 것이 원칙이고 마땅히 그래야 된다. 그리고 임금이 처세를 잘하거나 못함에 따라 비가 더 많이 내리거나 적게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날씨의 춥고 따스함과 임금의 행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군사가 얼어 죽는 일 또한 임금의 책임이 아닐진댄 임금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백성이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조 임금 부자의 현명한 상황판단과 양식 있는 행동에 모든 백성들은 감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 말고도 인조 임금은 군사의 생명을 지키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하여 일 개 청나라 장수에게까지 무릎을 꿇는 치욕적인 일까지도 감수했다. 때문에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존경받는 왕으로 회자(膾炙)되고 있음을 본다.역대 수백 명의 왕들 중 현명하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한 왕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되는 것만 보아도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의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옛날보다 국민 모두가 엄청나게 잘 살게 되었지만 사회 곳곳에 상하 갑질 관계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정치를 하는 큰 어른들, 솔선수범하는 일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고 권력의 칼날을 휘둘러 수하 비서에게 못할 짓을 하여 이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전 부산시장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전 경기지사는 현재 감옥에 들어가 있으며 거기에 일천만 수도 서울의 수장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현 정치판이 쓰레기더미보다 더 추악하게 된 현실을 국민들은 어떻게 봐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 모두가 상대방이 고발해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 이와 유사한 일들이 독버섯처럼 곳곳에 만연되고 있지는 않을까 의심이 증폭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태풍이 남해안을 강타하고 있을 때 오페라를 감상했던 대통령,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의 분명치 못한 처사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뒷얘기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분명한 것은 법에 어긋나거나 지탄받을 일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박수 칠 일은 더욱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럴 때일수록 남 탓하는 것에만 열을 올릴 일이 아니고 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도 필요하다. ‘나는 어떤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일을 평가할 때 우리는 대개 상식선에서 따지는 경우가 많다. 그 상식이 통하는 선 안에 들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긴 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칭찬 받을 만한 일을 하기는 어렵고 힘들지만 비난이나 지탄받을 만한 일은 빠르고 손쉽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모두는 결국 언젠가는 세상에 다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대개 남의 일에는 곧잘 평가를 잘하지만 자기 평가에는 인색하기 일쑤다. 남이 두는 장기, 바둑은 알이 선명하고 길이 훤히 보이지만 본인이 두는 바둑이나 장기는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어느 누가 말했다. 성인과 악인은 따지고 보면 종이 한 장 차밖에 안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대개 자기 눈의 들보는 안 보이고 남의 눈의 티끌은 알뜰하게도 놓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경말씀의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칠 자격을 갖춘 자가 한 사람도 없었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다만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는 상식과 양식이 통하는 선에서 다수의 긍정적 평가를 받는 자리에 올려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