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여행길에 맛있는 디저트를 먹다가 선생님 생각이 나서 사 왔어요. 오늘도 행복하십시오!” 일본 여행을 다녀온 고3 학생이 작은 디저트를 예쁘게 포장해 정성 어린 손편지와 함께 건네주고 갔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 걸음을 멈추었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그날은 온종일 마음속에 햇살이 내린 듯 따뜻했습니다. 선물이란 결국 물건이 아니라, 상대를 떠올리며 보낸 시간과 마음의 온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느덧 또 설날이 다가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설 선물과 차례 음식, 특히 대가족 음식 준비가 서툰 탓에 마음이 먼저 무거워지곤 했습니다. 달력에 빨갛게 표시된 설 연휴를 마주하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체한 듯 답답해집니다. 아마도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몸에 남긴 오래된 습관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사뭇 다릅니다. 창밖의 매서운 겨울바람마저 상큼하게 느껴집니다. 달력을 바라보는 입가에는 어린 시절 설날을 기다리던 아이처럼 잔잔한 미소가 번집니다. 며느리로 살아온 지 서른한 해 만에 남편에게서 ‘최고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선물’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일에는 늘 서툴렀습니다. 대신 가족을 책임지는 일만큼은 한결같았습니다. 정직과 성실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가장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든든함을 믿으며 서운함쯤은 마음속에 접어두고 살아왔습니다.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삼남매를 키우는 맞벌이 주부이자, 보수적인 집성촌의 외며느리로 살아왔습니다. 남편은 기제사와 묘사, 벌초와 성묘까지 집안의 모든 대소사에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고, 저는 실과 바늘처럼 묵묵히 그 곁을 따랐습니다. 아버님 기일이면 퇴근 후 마산 시댁으로 달려가 제사를 모시고, 새벽녘 돌아와 아이들을 챙겨 다시 출근길에 오르던 날들이 선합니다. 명절마다 한복을 정갈히 차려입고 제수를 챙기던 저의 이야기에 지인들은 생소한 듯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것이 며느리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내 삶의 몫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명절 풍경은 간소해졌습니다. 명절에 여행을 떠난다는 친구들 이야기도 자주 들려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한숨부터 내쉬는, 삶에 지친 얼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지난 추석, 저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조심스레 제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무거운 명절의 짐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진심, 명절이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쉼’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이었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오신 시어머님께도 이제는 음식 준비가 아닌 여행의 추억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까지 뜻을 보태자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해 보자”는 짧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뜻밖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어머님 생신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어머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올해부터 명절 차례는 그만 지내고, 기제사만 정성껏 모시자.” 그 한마디에 가슴속 응어리가 봄눈처럼 녹아내렸습니다. 하지만 진짜 선물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툭 던졌습니다. “이번 설 연휴엔 어머님 모시고 제주도로 여행이나 갈까?” “정말? 진짜? 이번 설부터?” 아이들의 환호성이 차 안을 가득 채웠고, 저는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서른한 해를 한결같이 며느리의 자리를 지켜온 제게, 그 말은 그 어떤 보상보다 값진 훈장처럼 느껴졌습니다. 명절에 떠나는 가족 여행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성촌 외며느리로 살아온 제게 그것은 남편이 건넨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2026년 설날은 어린 시절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그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이번 설 연휴, 저는 전을 부치던 기름 냄새 대신 제주 바다의 푸른 내음을 가족들과 함께 맡으며 추억을 만들어 올 예정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명절이 주는 무게로 가슴이 답답한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땅의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마음 깊은 응원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묵묵히 견뎌온 시간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귀한 선물이 되어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쏟아온 그 정성스러운 마음이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이름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 최고의 선물이 이번 설날엔 여러분에게도 전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