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비탈진 묵정밭은 오래전부터 사람 발길이 끊어지니 멧돼지가 주인이다. 물웅덩이가 있는 곳에는 멧돼지 털이 남아 분탕질하며 목욕한 흔적이 역력하다. 산을 개간하여 계단식 밭을 만들고 척박한 땅에 거름을 넣어 수수, 콩, 고구마 등 작물을 심어 가을이면 알곡들이 찬란하게 풍성했던 밭이다. 가난을 배불리게 했던 젖줄과도 같은 소중한 밭이었다.그 주인은 노쇠하여 요양원에 계신 지 오래다. 신작로에서 밭으로 난 명징했던 오솔길이 지워진 것처럼 요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도 지워졌을까. 길도 밭도 적요롭기 그지없다.오리목과 참나무 사이에 산초나무, 청미래 넝쿨이 이리저리 얽힌 밭두렁은 많이 허물어져 바위가 드러났다. 밭 귀에 아름드리 토종 밤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고 그 밤나무 아래서 밤을 주웠다. 수풀 사이로 떨어진 알밤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밤이 돌아서면 보이니 밤과의 숨바꼭질이고 보물찾기다. 정신없이 밤을 줍다 보면 산초나무 가시가 찌르고 청미래 넝쿨이 머리끄덩이를 당긴다. 칡넝쿨이 다리를 걸어 나자빠지기 일쑤지만, 앉았다 섰다 요리조리 수풀을 헤집으며 밤을 줍는 마음 풍성한 가을이다. 나 어릴 적 우리 동네는 밤나무가 없었고 따라서 밤이 귀했다. 증조부 산소 옆에 한 그루가 있었으나 수확량이 적어서 제사상에서나 볼 수 있었다. 명절 차례상에 올려지고 나서야 할머니가 주시는 밤을 한두 개 먹을 수 있었다. 아침 이슬에 젖으신 아버지께서 밤송이를 바지게로 따오시면 집게로 밤송이를 벌려 밤을 꺼냈다. 벌레 먹지 않은 깨끗한 것만 골라서 부엌 흙바닥을 파고 고운 모래로 묻어 갈무리하셨다. 벌레 먹은 밤은 할머니가 화롯불에 구워서 벌레 먹은 곳을 잘라내고 손주들 입에 넣어주셨다. 이듬해까지 종갓집 제사 때마다 부엌 바닥에서 한 움큼씩 꺼내어 뽀얗게 깎아 제사상에 올렸다. 단단한 겉껍질을 벗기고 속 껍질까지 벗겨야 먹을 수 있는 밤. 까기도 힘들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요즈음 아이들은 밤을 잘 먹지 않지만 제사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참 귀했던 밤이다. 사람 손이 가지 않은 아름드리 밤나무 아래서 알밤 줍는 일은 나에게 가을 최고의 놀이고 힐링이고 운동이다.다람쥐, 청설모 산짐승들의 겨우내 식량이지만 옛날부터 사람과 나누어 먹고 살았으니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되리라. 도토리만 한 토종 밤을 한나절 주워 모으니 양이 제법 많다. 요즘에는 부엌 바닥이 아닌 김치냉장고에 넣어 두면 서너 달은 족히 보관이 가능하다. 예순 중반의 옆지기와 옛 이야기할 때 좋은 주전부리가 될 것이다.
최종편집: 2026-04-03 22: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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