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로 백수 정완영 시인이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한 지 9년에 이른다. 이에 본지에서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11월 11일 봉산면 예지리에서 태어나 한국 시조 문학의 큰 족적을 남긴 백수 정완영 시인을 조명하기로 했다. 여기 원고는 지난해 10월 상주 낙동강문학관에서 열린 낙동강문학연구회 주최 낙강시제에서 권숙월 전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이 발표한 ‘백수 정완영 시인의 삶과 문학’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1919년 11월 11일 출생 백수 정완영 시인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11월 11일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에서 연일 정씨 문한가(文翰家)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12대조(代祖) 정유성 부인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차자(次子) 옥산공(玉山公)의 따님이기도 하다. 예지리는 황악산을 바라보며 추풍령 남쪽 자락을 깔고 앉은 큰 마을로 봉계라고도 부르는데 조선조 성종 때 ‘두시(杜詩)’를 언해(諺解)한 대문장가 매계(梅溪) 조위(曹偉) 선생의 고향으로 지금도 구거(舊居)가 남아 있다. 해마다 시조 작품을 공모해 백수문학상을 시상하는 것처럼 시집을 공모해 매계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정완영 시인은 황악산을 늘 마음에 품었다. 김천을 내려다보는 황악산은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 시인은 제자들에게 “내 생일이 11월 11일인데 황악산도 1111m”라며 고향의 산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정완영 시인의 고향 사랑은 그의 호(號)에서도 나타난다. 백수(白水)는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파자해서 백(白)자와 수(水)자로 만든 것이다. 이 마을을 정 시인은 “내 고향은 소백산맥이 구비쳐 내리다가 한번 힘을 불끈 주어 추풍령을 앉힌 자리, 그 추풍령 영마루에 흰 구름 한 자락을 얹어놓고 걷노라면 절로는 은은하게 거문고 소리라도 들려올 듯한 상념의 하늘 아래 금 가고 땟국도 묻은 이조백자처럼 말없이 앉아있는 마을”이라고 했다. 문학세계에 눈을 뜨다 정완영 시인이 문학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이었다. 보통학교(현 봉계초등학교) 5학년에 복학한 시인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줄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학교에는 이선홍 홍성린 교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 시인이 시조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두 교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민족 정서를 아이들에게 심어주었고 특히 시인에게 크나큰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정서를 고취시키려는 교사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두 교사는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만 했다. 스승은 떠났지만 시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에 충분한 인연이었다. 이후 시조에 탐닉하기 시작한 정완영 시인은 시조로 평생을 살았다. 시인의 두 스승 1957년 이호우 시인을 만난 후 스승과 같은 선배의 예우로 받들었다는 시인의 또 다른 스승은 조운(曺雲)(1900~1948년) 시조시인이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월북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는 분이지만 백수 스스로도 “나의 스승은 조운 선생님”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물론 조운 시인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조운의 문학세계를 동경했고 홀로 하는 시조공부였지만 즐거웠기에 외롭지 않았다.늦깎이 등단 백수 정완영 시인은 시조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작가로서 원활한 활동을 펼치려면 등단이라는 관문을 거쳐야 했지만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등단에 별 관심 없는 시인의 모습에 주변 지인들이 더 답답함을 느꼈다. 정완영 시인의 나이 마흔 때인 1960년 그의 자형이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와 ‘애모’를 몰래 응모했다. 그때 ‘해바라기’가 당선됐으나 심사위원들은 ‘애모’에 관심을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애모’를 청마 유치환 선생에게 보여주었고 권위 있는 문예지 ‘현대문학’에 ‘강’, ‘어제 오늘’로 3회 추천(추천완료)을 받았다.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국’이 당선됐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이후 정완영 시인은 등단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창작에 대한 욕구는 높았지만 시인은 여느 작가들만큼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했다. 1941년 시조창작 관계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문 휴유증으로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대부분의 작품을 컴퓨터나 타자기로 써야만 했다.
백수, 시 그 지난한 길 시의 길은 자기로부터 출발해 자기를 찾아 나서는 아주 멀고도 지난(至難)한 길이다. 하기 때문에 이 길을 잘만 가면 구원의 길이 되지만 길을 잘못 들면 몽유병환자의 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시란 생활이 아니고 꿈이고 소득이 아니라 출혈이며 회중(會衆)이 아니라 고립(孤立)이다. 타협이 아니라 독존(獨尊)이며 공명(共鳴)이 아니라 공감(共感)이다. 시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이다. 백수 시인은 이사를 여러 번 했음이 2002년 2월 24일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짐을 꾸려 싣고 남현동을 떠난다. 사과박스 29개를 싣고 오늘 오후 화곡동 윤아의 집으로 우선 간다. 윤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내일 김포로 들어갈 참이다. 청주서 일 년 반, 경아 집에 올라와서 2년, 다시 오피스텔에서 2년, 문자 그대로 생생유전(生生流傳)이다. 이제 찾아가는 김포라는 곳은 어떤 고장인가? 여기는 또 얼마나의 세월을 머물 것인가? 22번째의 이삿길이다. 이제 그만 죽어 묻힐 자리 찾고 싶은데……. 내 유랑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2009년경 대항면 덕전리 한적한 곳에 ‘草草詩室’이라고 이름한 주택을 어느 독지가가 지어주어 3년여 거주하셨다. 그러다 2012년 부곡동 우방아파트로 이거해 살다 건강이 좋지 않아 아파트를 팔고 서울로 이사해서 마지막엔 요양병원에서 지내셨다.1,000편이 넘는 작품을 쓴 시인 백수 정완영 시인은 1,000편(본인이 약 3,000수를 썼다고 함)이 넘는 작품을 쓴 시인이다. 13권의 시조집 외에도 2수 연작시조집, 3수 연작시조집(시전집, 동시조집 3권(동시선집 제외), 동시화집 1권을 출간했다. 140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한 시인으로 알려진 백수 정완영은 등단 이후 거의 매일 일기 형식의 시조 작품을 쓰며 정화된 시어의 세계를 선보였다. 개성적 표현 기법과 시조 본연의 율조를 조화시켜 자유시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서정시의 경지를 이뤘다는 평을 받았다.교과서에 수록된 작품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은 5편이다. △1974년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조국’ △1984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부자상(父子像)’ △2010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배밭머리’ △1983년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분이네 살구나무’ △2010년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교과서에 ‘봄 오는 소리’가 수록됐다.한국 최초의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 듯이’ 정완영 시인은 어린이를 위한 동심의 세계를 담은 많은 동시조를 써서 발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 듯이’(가람출판사, 1979)를 비롯해서 ‘엄마 목소리’(토방, 1998)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문학동네, 2011)과 동시화집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사계절, 2007)을 출간했다. 까치가/ 깍 깍 울어야/ 아침 햇살이 몰려들고 꽃가지를/ 흔들어야/ 하늘빛이 살아나듯이 엄마가/ 빨래를 헹궈야/ 개울물이 환히 열린다. 최초의 동시조집 ‘꽃가지를 흔들 듯이’ 표제 작품이다.
동시조집 머리말을 통해 본 정 시인 정완영 시인은 “어린 시절 키가 모자라서 별을 못 따는 줄 알고 바지랑대를 등에 메고 동산 위에 올라간 적이 있다”고 동시조집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머리말에서 밝혔다. 이어 “공부도 하기 싫고 노는 것도 시시한 날은 빠른 길을 옆에 두고 논두렁밭두렁 길을 멀리 돌아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고 하셨는데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엉뚱한 호기심을 많이 갖고 계셨나보다. 그런 성품이 돌아가시기 전 몇 해는 거의 동시조 창작만으로 시간을 보내셨다. 동시조집 ‘엄마 목소리’ 머리말을 보면 정완영 시인이 동시조를 쓰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사랑이 식어간다고 하고 정이 메말라간다고 한다.그러나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거기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 그 불씨에다 모닥불을 지피려고 팔순 늙은이가 여덟 살배기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이 노래를 불러본 것”이라고 했다. 다섯 살 우리 아기 앞니 빠져 내리듯이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쏙쏙 빠져 내립니다 사비약 사비약 하며 사비약눈 내립니다동시조 ‘사비약 사비약 사비약눈’ 전문이다. 사비약눈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아니라 아이들 이가 빠지듯이 한 잎 두 잎 내리는 첫눈이라는 주가 달려 있다. 첫눈이 오는 것을 아기의 앞니가 하나 둘 빠지는 모습으로 비유를 했으니 얼마나 앙증맞고 맛깔스러운가. 어릴 적 우리가 좋아하던 펄펄, 소복소복, 뽀드득뽀드득 등 눈이라고 하면 떠오르던 그 예쁜 어휘들을 한꺼번에 다 삼켜버리고 말았다. 첫눈이 올 때마다 쏙쏙 빠지는 아기의 잇몸을 생각하며 미소 지을 것 같다. 또한 아기의 빠진 앞니를 볼 때마다 사비약 사비약 눈 내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정완영 시인이 불러내는 동심은 이렇게 엄마와 아가의 품뿐만이 아니라 텃밭에도, 겨울 하늘에서도 마구 쏟아진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우리의 한글, 그 한글의 자수와 어린 정서가 만나고 그 뜻이 운율에 맞게 잘 빚어진 동시조이다. 또한 조곤조곤 노래하는 듯한 시어에 어깨가 들썩거리는 작품이다. 시조란 것을 미리 알 필요도 없다. 읽어 보면 시조 특유의 리듬감이 혀에 착착 감긴다. 학부모들이 10년, 20년 전 교과서에서 읽었던 옛시조와는 다른 현대시조의 파격적인 행갈이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떠올리게 한다. 시어 선택도 감각적이다. 망설이듯 수줍게 내리는 사비약눈의 풍경을 “다섯 살” “쏙쏙” “사비약” 같은 ‘ㅅ’ 소리의 시어로 묘사했다.생존 시인 최초의 백수문학관 2008년 생존 시인으로는 국내 최초로 직지사 가까이 시인의 호를 딴 백수문학관이 세워졌다. 이듬해인 2009년 제1회 백수문학제가 열려 6회까지 직지사 경내에서 지속된 것도 특기할 일이다. 정완영 시인께서도 참석한 백수문학제는 백일장, 문학강연, 시낭송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백수문학관에서는 2009년부터 지금까지 16년간 문학아카데미가 운영되고 있다. 시조반과 시‧수필반으로 나눠 매년 봄학기와 가을학기(학기당 12주 과정)로 2022년까지 김천시, 2023년부터는 김천시로부터 김천시시설관리공단이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강사는 장병우 시인(2020년까지 노중석 시인)과 권숙월 시인이다.
시조문학의 큰 별 2016년 8월 27일 오후 3시경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본요양병원에서 유족과 후배, 제자들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노환으로 별세(향년 98세)한 정완영 시인 유족으로는 3남(경화, 성화, 준화) 2녀(윤희, 은희)가 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시조문학의 큰 별 정완영 시인 별세’ 등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영결식은 8월 31일 오전 7시 서울성모병원에서 한국시조시인협회 주관 문인장(장의위원 120명)으로 엄수됐으며 장례위원장은 민병도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이 맡았다. 이날 영결식에서 조사는 성춘복·이상범 시인, 고별사 권갑하 시인, 조시는 백이운 시인이 맡았다. 김천시는 2008년 건립된 백수문학관에 분향소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유해는 백수문학관 뒷산에 수목장으로 안장됐다. <권숙월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