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으로 통칭되는 교동의 입구에는 연화지라 불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연화지에 벚꽂이 만발하면 김천시민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야간 벚꽂길투어를 나서는 일이 일상이 되고 그 호수 길 주변에는 하나둘씩 커피점과 식당이 자리를 잡더니 이제는 김천 최고의 산책, 드라이브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교동 연화지지금은 평화동, 신음동, 부곡동, 율곡동에 밀려서 도심 속의 시골 같은 분위기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 교동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동잠현과 금산현, 금산군의 관아가 위치했던 이 지방의 오랜 읍치(邑治)이자 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성기를 구가했다.일제강점기인 1914년 주변의 마을들을 삼락동과 문당동, 교동으로 나눠 금릉면으로 개편됐다가 1920년대에 인구가 많은 남산동 현재의 중앙보건지소 자리로 법원, 검찰청자리에 있던 김천군청을 옮기면서 교동은 행정의 중심지로서의 기능마저 잃고 예전의 읍치라는 뜻의 옛 구(舊), 고을 읍(邑)의 구읍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교동의 흥망성쇠를 수백년간 교동 연화지 입구에서 지켜보았을 아카시아 고목 하나가 있다. 매년 벚꽂이 흐드러지게 피고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봄철마다 몸뚱이가 처절하게 베어지고 껍질은 무자비하게 벗겨진 채 방치된 이 나무가 더욱 안쓰럽다.
수령 300년 추정 아카시아나무대를 이어 연화지 주변에서 살아왔다는 한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수령은 300년쯤 돼 보인다고 하며 옛날 교동 관아로 들어가는 첫 길목에 버드나무와 아카시아 고목이 많았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들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자신들의 국화인 벚나무를 연화지 주변에 심었는데 이때 요행히 한 나무의 아카시아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그런데 수난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아카시아나무를 흔한 수종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잘라내는 등 천덕꾸러기 취급을 해 지금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며 고사 직전이라는 것이다.또 다른 주민은 예전에는 아카시아 꽃이 피면 화사하게 보기가 좋았는데 벚꽂만 자꾸 귀하게 여기고 관리하다 보니 인근 상가에서도 연화지와 벚꽂을 가린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르다 보니 저 몰골이 됐다고 혀를 찼다.수백 년 전부터 교동과 연화지를 지켜온 역사의 증인인 고목 아카시아가 하루속히 보호수로 지정돼 고목으로서의 걸맞은 대우를 받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구읍 입구아카시아 고목 주변의 연화지와 봉황대는 김산향교와 함께 이곳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봉황대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됐다.봉황대는 사방 3간의 2층 다락으로 1700년 창건돼 읍취헌(邑翠軒)이라 불렀다. 원래 김산관아의 북쪽인 지금의 김천법원 자리에 있었으나 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봉황대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 연(鳶)자에 바뀔 화(嘩)자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 이름 지었고 그 날아간 봉황의 방향이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 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다.따라서 연화지는 솔개이고 봉황대는 날아오르는 봉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솔개가 봉황이 돼 날아오르는 군수 윤택의 꿈이 실현된 공간인 것이다. 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에 연화지와 봉황대가 등장하는데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성종 때 시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봉황대에 올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금릉 아름다운 땅, 맑은 물결이 일렁이네물속에 비단비늘이 가득하고, 바람에 수양버들이 나부낀다푸른 것은 3만개의 연잎이요, 붉은 것은 열 길의 연꽃이네좋은 경치를 감상함은 내 분수가 아니니, 떠나는 수레 타고 이곳을 지난다 김산향교가 있음으로 해서 교동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이 마을은 동쪽으로 부춘산을 사이로 시청이 있는 신음동과 접해있고 서쪽은 구화산에서 발원한 소하천(지금은 복개가 됨)을 경계로 삼락동과 맞대고 있다.교동은 조선시대에 금산군 군내면으로 속해 향교가 있는 일대를 일컫는 교리(校里)와 향청이 있던 향리(鄕里)로 나눠 불리기도 했다.또 김산골, 동부, 서부, 구읍으로도 불렸는데 김산골은 옛날 김산군의 읍이 이곳에 있었음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며 동부와 서부는 마을의 중심을 관류하는 소하천을 경계로 동쪽과 서쪽의 마을을 각각 일컬음이다.1996년 택지개발과정에서 발견된 김산군 관아지와 객사지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과정을 통해 읍치에 대한 규모가 나타나 학계의 이목이 집중됐다.관련 사료에 나타난 김산군의 행정조직은 종4품의 군수1인과 별감2인, 군졸 53인 등이 있었고 1482년(성종13년) 건립된 관아와 객사, 향사당이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고 기록돼 있다. 김산관아와 함께 중심축을 형성한 김산향교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의 남쪽 1리에 향교가 있다”라는 기록으로 미뤄 적어도 1530년 이전부터 향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김산향교 터에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구화사(九華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이 개국되면서 그 절을 허물고 김산향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이후 임란 때 전소된 것을 1634년 (인조12) 조마 강곡의 진사 강설(姜渫)과 아들 강여구(姜汝榘)가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수하기에 이르렀다.
김산향교화재로 대부분의 자료가 사라졌는데 1718년 여이명(呂以鳴) 선생이 쓴 ‘금릉지(金陵誌)’에는 당시 김산향교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전에는 동재, 서재에 유생들이 50·60명에 불과했으나 지금 와서는 100명이 넘고 향사일에는 고성으로 떠들고 천한 사람이 귀인을 능멸하는 등 망측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조선 후기 들면서 향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풍기가 문란해가는 모습을 뜻있는 선비로서 안타깝게 그리고 있는 대목이다.삼락동 김천법원으로부터 코아루아파트를 지나 구화산으로 난 산길을 2㎞ 남짓 오르면 구화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구화사구화산에 위치한 구화사는 원래 고산사(孤山寺)의 산 내 암자 중의 하나인 벽루암(碧樓庵)이 있었다. 고산사 터는 지금의 김산향교 자리로 예부터 명당으로 이름이 나서 향교 터를 물색하던 관아에서 고산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김산향교를 건립했던 것이다. 절터를 빼앗긴 고산사는 지금의 벽루암으로 옮겨가고 절 이름을 영화암(映華庵)으로 고쳤다가 훗날 구화사로 바꾸었다. 비출 영(映)에 빛 화(華)자의 영화암 또는 아홉 구(九)에 빛 화(華)자의 구화사라는 사명은 당시 법당에 모셨던 부처님이 두상이 광채를 밝게 비추더니 아홉 번까지 밝게 비췄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산사는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산 내 암자가 12개에 이르고 소유한 토지 또한 많았다고 전해진다. 경내에 있는 ‘구화사중창불사공덕비’에는 “소백산맥 구화산에 영화암(映華庵)을 개산(開山)하니 조선 초의 일이다. 영화암으로 수백 년을 이어오다가 고승 석덕(碩德)이 포교와 불사를 일으키다 화재로 전소되고 사지(寺址)만 있던 것을 해방 후 주지 장준우(張俊雨)가 법당과 요사를 1동씩 짓고 사명을 구화사로 고쳤다. 비구니 철혜((哲慧)가 중창했으나 다시 화재로 법당이 탔으나 다행히 비로자나불은 소실을 면했다. 주지 철혜 비구니가 법당과 요사를 신축하고 탱화를 조성했으며 도로를 개설하는 등 불사를 일으켰다.” 구화사는 대웅전과 선원, 요사로 이뤄졌다. 대웅전은 1980년 철혜(哲慧) 비구니에 의해 정면 5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건립됐다. 불전 내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빛을 발했다는 불상은 도난을 당하고 뒤에 다시 봉안한 불상으로 등이 굽고 깍지를 낀 손 모양으로 통상적인 비로자나불과는 차이가 있다.예부터 구화산은 풍수지리상으로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老鼠下田)형의 명당으로 꼽은 길지로 알려져 있다. 노련한 늙은 쥐가 곡식이 있는 밭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곧 재물을 모은다는 의미로 해석돼 이러한 터에서는 큰 부자가 나온다고 본다. 그러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구화사에서 기도를 드린 불자들 중에 이름 있는 부자가 여럿 나왔다고 전해진다. 권숙월 편집국장